2019년 4월 13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1-24)
지난 주 아모스의 고향인 드고아에 다녀왔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이 길을 막아섰다. 위험 지역인데 왜 들어가냐는 것이다. 이곳은 서안지구에서도 Area A구역이라 이스라엘 시민들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이라 그 풍경을 보고싶다고 말했다. 그 군인은 혹시 모르니 연락하라고 자기 전화번호를 주며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나는 다시 성경의 드고아 지역 좌표를 향해 차를 몰았다. 마을 초입에서 양떼를 돌보는 드고아의 목자를 만났다. ‘2800년 전 아모스가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반가운 나머지 차에서 내려 그분께 인사했다. ‘앗 쌀람 말라이쿰!’ 그 분이 다가와서 뭐라고 말을 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미소로 답을 하며 서둘러 아저씨와 작별인사를 했다.
남유다의 한 작은 마을 드고아.. 이곳에서 양을 치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목자 아모스는 왜 북이스라엘까지 건너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을까? 오늘 본문 5장에는 아모스가 전하고자 했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나온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말씀이다.오늘은 그가 외친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암 5:1-2,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아모스는 5장에서 애가를 부른다. 애가는 누군가 죽었을 때 죽은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다. 1절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엎드려졌다’, 즉 이스라엘이 죽었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아모스가 애가를 부른 그 시대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때였다. 여로보암 2세가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번영했을 때이다. 그런 시대에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죽었다고 애가를 불렀다. 여기서 ‘엎드려졌다’는 히브리어로 ‘나팔’이란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완료형인 ‘나플라’로 표현되어 있다. ‘완료태’라고 하는데 미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과거시제를 쓴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작정하셨고,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모스의 애가는 약 40년 뒤 역사적인 현실이 된다.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다.
암 5:3,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 90%가 죽음에 넘겨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노의 심판 중에라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살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암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을 찾는 자는 작정된 심판가운데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약속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아모스서 5:14절을 보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4절에서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는데, 14절에서 ‘살려면 선을 구하라’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곧 선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선을 구하는게 무엇이냐, 그것은 15절에서 알 수 있다. 암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선을 구하는 것은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성문은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활의 중심지였다. 재판이 이루어지고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장소이다. 그곳은 그들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삶의 현장인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삶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나라는 망해가고 있지만 그 중에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워가는 자들을 멸망 중에 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암 5:5-6,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나를 찾으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벧엘을 찾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길갈로 가지 마라,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어디인가?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곳이다. 이후 사람들은 그곳을 성지로 만들었다. 아모스 시대에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 드리던 장소였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빌었다. 그러나 거기에 금송아지 형상과 이방신들의 우상이 있었지 하나님의 임재는 없었다. 거기에는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 복을 받고 싶은 간절한 바램은 있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7절부터는 당시 북이스라엘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암 5:7,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여기서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משפט)’이다. 재판, 판결이란 뜻이다. 미쉬파트는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질서를 의미한다. 공의는 히브리어로 ‘쩨다카(צדקה)’이다. ‘올바름, 의’란 뜻이다. 쩨다카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서로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악으로 바뀌었고,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땅에 떨어져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미쉬파트와 쩨다카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국가적인 소명이자 존재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창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땅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민족을 세우기 위함이다. 여기서 ‘의와 공도’가 바로 ‘쩨다카’와 ‘미쉬파트’이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셨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 그 때 공의로운 관계를 위한 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출 23:6-8,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낭독한 모든 언약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라”(출 24:7)고 약속한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서로를 형제처럼 돌보는 공동체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거짓과 착취, 살인과 폭력은 존재할 수 없다. 가난한 자, 부자의 양극화도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공의와 정의가 나타나는 나라를 만들기 원하셨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이라는 제국에서 구원해 내신 것이다. 그래서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는 절기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복 받고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세우는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아모스가 고발하는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자. 암 5:10-12,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아모스는 한 마디로 공의와 정의가 무너져내린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성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성문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야할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들을 억울하게 했다. 성문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의와 정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에 죄가 가득하게 된다.
당시 남유다의 상황은 어땠을까? 동시대의 선지자 이사야의 선포를 보면 비슷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지만 도리어 그들의 삶은 포학으로 가득했다. 정의는 ‘미쉬파트(משפט)’인데, 포학은 ‘미쉬파흐(משפח)’다. 정의가 사라진 자리에 폭력과 피흘림이 따름을 언어유희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지만 이스라엘 사회에는 부르짖음이 가득했다. 공의는 ‘쩨다카(צדקה)’인데, 부르짖음은 ‘쩨아카(צעקה)’이다. 관계속에서 올바름이 사라질 때 고통과 울부짖음이 가득하게 된 것을 역시 언어유희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목적과 소명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암 5:22-23,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예배를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내고 종교적 열심이 있어도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포한다.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큰 물이 흐르면 그 땅을 완전히 뒤덮게 된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삶의 모든 영역에 가득하게 하라고 도전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폭력과 피흘림이 끊이지 않고, 여전히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강같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경제 윤리는 가진 자들을 위해 적용되고 있고, 법은 힘 있는 자들을 위해 집행되고 있다. 돈을 우상시 하는 자본주의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을 것만 같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 힘없는 자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며, 승자들은 모든 것을 독차지하기에 너도나도 힘있는 자가 되려고 쉴 새없이 살고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벌써 오래 전부터 사망과 심판을 작정하셨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미 애가를 부르고 계신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은 주님이 오시기 전의 세상 제국 바벨론의 패망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계 18: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이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계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이 예언은 언제가 반드시 현실이 될 것이다. 이미 멸망을 선포하셨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요셉의 남은 자가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다.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과 같다. 이 땅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가라고 부르신 것이다. 교회인 우리는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를 찾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축복을 부적처럼 믿고, 성공과 번영을 빌어주고 격려하는 그런 모임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교회 안의 종교적 활동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성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삶의 현장과 일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 나아가야 한다. 힘과 권력이 있는 자들의 만찬의 자리에서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 바라기는 끝까지 요셉의 남은 자가 되어 삶의 현장에서 공의와 정의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