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2019년 5월 4일
창립 12주년_ 충만한 교회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1:25-26)
이번 주에 홀로코스트 기념일이 있었다. 그 날 큰 아들 승구 담임선생님이었던 오릿과 학교 교장인 타미를 초대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한국식 숯불 갈비와 잡채, 매운 막국수를 대접했다. 엄청 맛있게 드셨다. 식사를 하며 이집트 시내산에 다녀온 얘기를 나눴다. 위험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집트에 다녀온 다음 날 사마리아 유월절 행사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분들은 또 위험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분들은 자신들은 갈 수 없는 지역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은근 부러워했는지는 모르겠다. 교장 선생님 타미는 세상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복음을 나누게 되었다. 이사야 53장이 말하고 있는 고난 받는 종이 예수님임을 밝히는 동영상도 보여드렸다. 메시아닉 유대인이 만든 동영상이었다. 교장 선생님 타미는 불편했는지 중간에 아들을 부르러 갔다. 그러나 오릿 선생님은 끝까지 9분짜리 동영상을 다 보았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다 들은 것이다. 이런 날이 오다니 너무 감격스러웠고 감사했다. 이스라엘에 온지 8년만에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유대인 친구에게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롬 11:11-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바울은 유대인들이 넘어졌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넘어진 것은 구원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우리 이방인들이 누리는 구원의 풍성함은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게 된다. 우리의 풍성함이 그들을 시기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방인인 우리들이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풍성함 때문에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회복하면 그들의 충만함은 다시 이방인들에게 더 큰 영적인 풍성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한다. 롬 11:25-2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말한다. 내용을 정리하면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러기까지 이스라엘은 우둔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깨달은 신비는 뭘까? 신비는 헬라어로 ‘뮈스테리온’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사용했다. 엡 3:2-6,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바울이 깨달은 비밀이 뭘까? 그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아브라함이 처음 받았던 언약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세대 사람들이 전혀 깨닫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또한 당대의 다른 유대인들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였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던 이방인들이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미스테리였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수의 유대인들의 눈을 가리고서라도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하셨다. 이것이 신비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았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비는 다시 이스라엘을 향한다. 이방인들이 누리는 영적인 풍성함들을 이스라엘이 부러워하게 되면서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한다. 롬 11:25-26절을 다시 읽어보자.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지금 예언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로마에 있던 당대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인을 향하여 자만하는 태도를 갖지 말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충만한 수’는 헬라어로 ‘플레로마’다. ‘충만’이란 뜻이다. 수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들어온다’는 말은 헬라어로 ‘어떠한 상태에 들어가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방인이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될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우둔함이 벗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이 충만하게 되면 그것을 본 이스라엘이 눈이 열려서 우둔함이 벗겨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은 모든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부르는 표현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면 그것을 보고 부러워하다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하여’라는 말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 이후에’라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라는 뜻이다.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충만함에 이르게 되는 그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구원이 방식이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음을 소개한다. 롬 11:26-27,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구원자는 앞으로 오실 재림 예수가 아니다. 이미 오신 예수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 59: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이 구약의 약속대로 예수님은 시온에 오셨고 이스라엘 자손가운데 회개하고 죄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충만이 임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바, ‘이방인의 충만’을 가능케 하는 근원이다. 요 1:16-17절에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여기서 충만이라는 말이 바로 헬라어 ‘플레로마’다.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방인 사역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교회가 이 충만함에 이르는 것이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울은 이방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길 원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그들이 충만해지기를 기도했다. 엡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롬 11:13-14,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충만할 때 자신의 골육친척 이스라엘이 그것을 보고 시기하며 돌아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롬 11:28-31,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우리에게 이른 것임을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만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긍휼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바울이 교회를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인을 통해 넘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엡 2:14-16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은 서로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는 한 새사람이 되어 화평을 이루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이제는 서로 미워하는 둘이 아니라 한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백성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원수가 사라진다.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교회는 이렇게 하나되는 일을 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두려워하는 유대인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끌라고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다.
욥바교회가 이스라엘 땅에 세워진지 12년이 되었다. 이방인인 우리가 이스라엘 땅에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다. 바울을 통해 보여주신 교회의 목적을 이루어갈 수 있는 특별한 기회와 사명을 우리는 받은 것이다.
바라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그 높음과 깊음을 더욱 깨닫고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은혜와 진리이신 그분의 충만함에 이르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충만할 때 사람들이 끌려 온다. 충만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내 것을 열어 내어 줄 수가 있다.
바라기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고 시기할 수 있게되는 그런 삶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충만을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갈망하고 그것을 얻게 되길 소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접붙여짐으로 함께 더 큰 영적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우리의 충만을 통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아랍사람들이 함께 복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우리 교회가 되길 소원한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충만한 은혜로 넘어진 이스라엘을 일으켜주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