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2019년 5월 11일 이익환 목사
아모스 5 잔치는 끝났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암 6:6-7)
여유있는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램일 것이다. 그래서 여유있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의 목표가 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여유 없는 삶을 산다. 재산을 더 많이 모으거나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애쓰며 산다. 그러나 너도 나도 이러한 삶의 태도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목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공동체가 사라진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지켜지지 않게 된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그 일원인 개인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오늘 아모스서 6장은 공동체를 상실한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암 6:1,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여기서 시온은 남유다의 수도이고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다.거기서 안일하게 사는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아모스 선지자가 전하고 있다. 아모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하맛 어귀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를 이루었다.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층들은 그로 인해 마음이 든든했다. 거짓 안정감이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거짓안전감을 흔들어야 했다. 암 6: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거짓안전감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에게 심판이 다가온다는 선지자들의 말을 거부했다. 그들은 ‘흉한 재앙의 날들이 멀다’고 말했다. 그러한 그들의 안일은 포악의 지배를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판이라는 불행을 피하고 싶었으면서 오히려 불행을 더 불러들이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심판을 부르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자. 암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당시 상아는 이스라엘에 없는 것이었다. 수입을 해야 하는 물품이었다. 상아 상은 극한 사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상위 1%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실제로 사마리아성에서 많은 상아 장식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대인들도 상위 1%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명품을 소유하기 원하는 로망이 있다. 그런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들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긴다.
암 6: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다윗이 연주했던 악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향락을 위해 악기를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암 6: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들은 포도주를 대접에 부어마시며 향락에 빠졌다. 귀한 향유를 몸에 바르며 자기 도취에 빠졌다. ‘귀한 기름’은 히브리어로 로쉿 세마님(ראשית שמנים)이다. ‘첫번째 기름’이라는 뜻이다. 이 첫번째 기름은 가장 좋은 기름으로 성전에서만 사용해야 했다. 이 기름으로 성전의 메노라를 밝혔고, 왕과 대제사장을 기름부을 때도 이 기름을 사용했다. 출 30:31-32절에선, 이 기름을 사람의 몸의 붓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그런데 사마리아 상위 1%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상급 기름을 발랐다. 자신들이 신이 되어 자기 만족과 영광에 빠져 살았던 것이다.
포도주를 마실 수도, 향유를 몸에 바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런 삶을 누리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칭하는 말이다. 상위 1%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살아갔다. 그러나 백성의 머리로 세워진 그들이 일반 백성들의 환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모스서 이전 장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사실 요셉의 환난을 초래한 원인제공자들이었다. 암 4: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처럼 공동체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행복만을 위해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사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암 6:7,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떠드는 소리’는 히브리어로 ‘미르자흐(מִרְזַ֥ח)’인데, ‘잔치, 연회’라는 뜻이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잔치가 끝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그러므로(לכן) 이제는(עַתָּ֥ה) 사로잡히는 자 중에(גֹּלִ֑ים) 앞서(בְּרֹ֣אשׁ) 사로잡히리니(יִגְל֖וּ)’ 여기서 앞서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로쉬’ ‘제일 첫번째’로 라는 의미다. 1절에서 지도자는 백성들의 머리(로싯 하구임, רֵאשִׁ֣ית הַגֹּויִ֔ם )라고 표현되었다. 6절에서 그들은 귀한 기름, 첫번째 기름(로싯 쉐마님, ראשית שמנים)을 바르던 자들이었다.그런데 그들이 이제 포로로 끌려갈 때는 제일 첫번째로(베로쉬, בְּרֹ֣אשׁ) 끌려가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모두가 머리를 뜻하는 ‘로쉬(ראש)’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상위 1%로 가장 특권을 누리던 자들이 가장 먼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눅 20:46-47,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막 9:35,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상위 1%의 삶을 너무 동경할 필요가 없다. 상위 1% 의 삶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한다.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이다.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더욱 엄중한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다. 이 원리에서 벗어나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암 6: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가 당신을 두고 맹세하셨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에 가득한 것을 원수에게 넘기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야곱의 영광’은 고난 대신 영광과 축복만 추구하는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는 보여주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온갖 복은 다 받기 원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관심갖지 않으면서 야곱의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신다.
암 6:12,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리는 것, 소가 거기서 밭가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암 6:13,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히브리어로 ‘허무한 것’은 ‘로 드발(לֹ֣א דָבָ֑ר,Lo debar)’, ‘뿔들’은 ‘카르나임(קַרְנָֽיִם, Karnaim)’이다. 이것은 여보로함 2세 때 정복한 길르앗 지역의 도시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 지역을 차지했다고 자랑했다. 구약에서 ‘허무한 것’은 우상을 말한다. 사람들이 허무한 것을 주목하며 거기서 기쁨을 찾는 나라는 망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그 사회에 심지 않는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자신의 힘만 믿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말씀을 선언하신다. 암 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앗수르의 왕 디글랏 벨레셀 3세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이루어진다. 왕하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이 때가 기원전 734년 경이다. 그리고 기원전 722년 사르곤 2세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최후를 맞게 된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나라가 망하는 것은 군사력과 경제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위 1%의 사람들이 자신들만 누리며 백성을 돌보지 않을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그 강력했던 로마제국이 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건강한 나라는 백성들의 고통과 환난을 외면하지 않고 그 신음에 귀 기울이는 나라다. 더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덜 누리면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나라이다.
세상은 지금 온통 ‘너 자신을 위해 살라’고 말한다. 세상의 가치는 지금 ‘미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을 양산하고 있다. 미제너레이션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미제너레이션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야곱의 영광만 구하지 요셉의 환난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간 지름길이었다. 멸망 공식이었다. 나의 행복을 앞세우는 삶의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추구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헛된 야곱의 영광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누리고 싶은 것을 다 추구하면서 요셉의 환난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여유와 풍족함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취로 인해 나는 지금 자만하거나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나의 행복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져야할 것까지 나를 위해 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파멸을 피하기 원하면서 오히려 파멸을 불러오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먼저 구하는 사회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상위 1%가 누리는 것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에서 공의와 정의를 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행복의 변수는 내가 머리가 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이 나의 머리, 주인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를 심는 자들을 주목하신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이웃을 돌보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세상에서는 덜 누릴 수 있지만 다 누리고 살다 망하는 것보다 낫다. 바라기는 세상의 잔치가 끝난 곳에서 하나님 나라 잔치를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