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6월 29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4 아들의 명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 4:4-7)
큰 아들 승구가 이스라엘에 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오늘 뭐 먹어?’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하는 말이 ‘저녁 뭐먹어?’이다. 아들이니까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손님이라면 이런 질문 할 수 없다. 주는대로 먹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아들의 명분’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본문은 밝힌다. 아들의 명분,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갈 4: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기 전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시대 때는 주인의 아들이라 해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가정교사의 지도 아래 있어야 했다. 주인의 아들은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유업을 상속받을 수 없었고, 또한 매도 맞아가면서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아야 했기에 종과 다름이 없었다. 바울은 우리도 이전에는 이 주인의 아들과 같았다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종노릇했고, 이방인들은 이 세상의 초보 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하며 살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들 역시 이 세상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라 종노릇하며 살았다. 그것이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욕망과 욕심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이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의 시대를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율법과 세상의 가치에 종노릇하는 삶을 끝내기 원하셨다. ‘속량’이라는 헬라어 ‘엑사고라조 (ἐξαγοράζω)’는 ‘값을 지불하다’는 뜻이다. 종으로 팔려 종노릇하고 있는 노예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몸값을 지불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그것은 평생 종살이 하던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기 위해서이다.
‘아들의 명분’이라는 헬라어는 ‘휘오데시아 (υἱοθεσία)’다. ‘아들로 받아들이다, 양자 삼다’라는 뜻이다. 로마시대 때는 전쟁이 많았다. 전쟁을 치르면서 귀족들은 아들을 많이 잃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상속해줄 아들이 필요했기에 노예시장에 가서 마음에 드는 아이들을 골라 양자로 삼는다. 양자가 된 노예는 입양되면서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을 다 상속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노예가 아닌 것이다.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 ‘다 이루었다’라는 헬라어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는 ‘다 지불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죄에 종노릇 하던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 자가 된 것이다.
자 그런데 아들의 명분에는 하나의 개념이 더 필요하다. 바로 ‘성장’이다. 유업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더이상 종노릇하던 삶을 벗어나 아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종노릇하지 않고 아들처럼 살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또 하신 일이 있다. 바로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갈 4: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 아들의 영,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다. 이 영의 인도를 따라 살 때 우리는 아들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유업을 받는 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롬 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에 종노릇하지 않게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상속자가 되는데 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자녀라고 해서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약속의 자녀가 돼야 한다. 아들과 상속자는 차이가 있다.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만이 유산을 상속하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다 같은 이삭의 자녀였지만 장자의 명분을 취했던 야곱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롬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까지 함께 받는 자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우리는 끝까지 상속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전에 그들이 종노릇했던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바울이 통탄할 노릇이었다. 갈 4:9-11,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성령을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전에 우리가 익숙했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천박한 세상의 가치와 욕망에 종노릇하는 것이다.
왜 성령이 필요한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에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된 자유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이러한 자유로 이끌기 원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가지 목표를 제시한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 안에 이루어지는 목표를 스스로 세운다. 우리가 작은 예수로 살아갈 때 비로서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 고난도 받으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 때 우리를 속량하여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종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들은 두려움에 기인하여 종교생활을 하고, 내일에 대한 염려로 하루 하루 매어 산다. 우리는 아들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아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치보지 않는다.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것이 곧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얻었다면, 세상에 종노릇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바 아버지’를 부르며 수시로 기도하셨다. 그러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아바의 자녀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