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7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5 성령을 따라 행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6-18)
로마서 8:14절에서 바울은“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광야에서 예수님은 40일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육체의 주림을 채우고자 하는 가장 강렬한 욕구가 예수님에게 있었다. ‘빵을 택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택할 것인가?’ ‘나의 영광과 부귀를 택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택할 것인가?’ 예수님의 마음에는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를 것인가, 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인가의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우리 안에도 있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한 자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처럼 성령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육신의 욕심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내 욕심, 내 옛 성품이 그대로 있는 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삶에는 새로운 갈등이 일어난다. ‘내 육체의 욕심을 따를 것인가, 성령의 인도를 따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살기에 이러한 갈등은 지극히 정상적인 갈등이다. 육체냐 성령이냐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통과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자.갈 5:16-17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것이다.육체의 소욕은 만족이 없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육체의 소욕이다. 갈 5:19-21절은 육체의 소욕의 열매를 이렇게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반드시 죄를 잉태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롬 8:6-7절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되면 사망의 길을 가게 되고,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단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유혹한다.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부추긴다. 우리를 유혹하는 선악과는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하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그것을 선택하는 결과는 참담하다. 음행과 더러운 것들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이 파괴된다. 자기를 존귀하게 보지 못하고 더럽다고 보는 것이다. 시기와 분냄을 통해 서로 분열되고 관계가 파괴된다. 내가 더 많이 갖고 높아지려는 욕심에 이끌릴 때 우리는 승자 독식의 전쟁 속에 경쟁하며 살아가게 된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의 결과는 참담하다. 이 때문에 이 땅의 피조물들이 고생하고 신음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8:19절은 말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세상의 피조물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분열되고 더럽혀지는 육신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게 되길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땅의 피조물들이 원하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근심이 아니라 희락이다. 전쟁이 아니라 화평의 열매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기로 선택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해 맺어지는 것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를 통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인본주의의 열매를 맺으며 자랑하려 한다. 그 결과는 육체의 일, 즉 음행, 호색, 분열, 방탕함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질 때 우리는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령을 통해 우리는 고난의 광야에서도 기뻐하며 하늘의 샬롬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웃에게 오래 참을 수 있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모든 피조물들이 원하는 바인 것이다. 금지할 법이 없는 것이다.원수를 사랑하겠다는데 누가 금지하겠는가? 내가 당신에 대해 참겠다는데 누가 금지하겠는가? 성령의 열매는 아무도 금지할 수 없는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길 바란다. ‘나 당신에 대해 오래 참을께’ 이렇게 말할 때 참지 말라고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라기는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길 축원한다.
성령충만은 어설픈 감정의 고조가 아니다. 이미 명백한 하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충성스런 선택이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뜻에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늘 아버지께 의존하는 아들로 사셨다. 요 5: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의존적인 아들로 사셨다. 그만큼 철저히 하늘 아버지를 의존하셨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진행되는 방식은 오늘도 똑 같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철저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성령의 뜻을 따라 자신의 삶을 행동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을 통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는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하는 기도를 바꿔야 한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성령님, 인도해주세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합니다. 깨닫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육신이 원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성령님은 이미 우리를 돕기 위해 오셔서 우리 속에 지금 거하고 계신다. 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