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 서로의 짊을 지는 삶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7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갈라디아서 6 서로의 짊을 지는 삶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5:25-6:2)

내가 남들보다 낫다고 느끼는 것을 우월감이라고 한다. 반면 내가 남들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것을 열등감이라고 한다. 열등감보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인 것 같다. 그러나 우월감을 기초로 한 삶은 피곤하다. 늘 남들보다 나아야 한다는 감정에 기초할 때,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불안이 따른다. 그리고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우월감을 느끼던 사람이 열등감의 나락에 빠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따라서 우월감과 열등감은 별반 차이가 없는 감정의 기제인 것이다. 우월감과 열등감을 초월해서 살면 어떻게 될까? 자유하게 된다. 감정을 소진하며 살지 않게 된다. 복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복음을 붙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새로운 자아에 기초해 살게 된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비결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5:25-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다.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면서 상처를 주고 받는다.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데 기초한 삶이기 때문이다. ‘헛된 영광’은 헬라어로 ‘케노독소스’다. ‘텅빈 영광’, ‘자기 자만’이란 뜻이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삶은 늘 불안하다. 영광스러울 줄 알고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달려갔는데, 거기에 진정한 영광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나음을 입증하는데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 마음을 쓰게 된다. 좀 나은 것 같으면 우쭐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못한 것 같으면 참담해진다.

헛된 영광을 추구한 결과는 뭘까? 26절이 밝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게 되는 것이다. ‘노엽게 하다’는 헬라어로 ‘프로칼레오마이’다. 다른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서 도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면서 취하는 태도다. ‘너가 나보다 낫다면 어디 한번 도전해보시지’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것이다. 소비사회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격동을 당한다. TV 광고를 보면서도 우리는 남들보다 우월하려면 이런 저런 것을 소유하라는 격동을 받는다.

한편 ‘투기하다’는 헬라어로 ‘프흐도네오’다. ‘질투하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나도 갖기 원하는 마음이다. 투기는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태도다. 따라서 우월감과 열등감은 모두 헛된 영광의 한 형태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신경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소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가치있는 사람이 되려 할 때, 우리는 결코 우월감과 열등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바울은 헛된 영광에 대한 갈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왜 복음일까? 그것은 우리 삶에 자유를 가져다 주는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새로운 자아에 기초해 살게 한다. 복음은 다른 사람보다 잘되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한다. 복음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라고 말한다. 6:1-2,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무슨 범죄한 일’은 헬라어로 ‘파라프토마’다. 고의적인 범죄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저지르는 실수를 뜻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다른 목표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죄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을 바로 잡아주고 그 사람의 죄짐을 함께 져주는 데에까지 가야하는 것이다. 바울은 비판 가득한 마음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권면한다. 바로잡는 것은 헬라어로 ‘카탈티조’다. 탈구된 뼈를 제자리로 돌려 놓다는 뜻이다. 그 사람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간음한 여인의 죄가 드러났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비판 정신이 가득했다. 그리하여 그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그 여인을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비판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집어 든 돌을 내려놓고 하나 둘 그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온유한 심령으로 여인을 직면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수님의 사랑의 직면이 그 여인을 회복시켰다. 사람들은 흔히 강한 처벌과 비판이 범죄한 사람을 바로 잡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온유한 태도와 사랑의 직면이 사람을 다시 제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의 짐을 함께 지는 것, 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다른 사람의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목표를 가진 사람은 남들과의 관계에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수 없다. 그 사람이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복음은 우리가 죄악 중에 잉태된 자라고 말한다. 복음은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눈에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악 중에 태어난 자이기에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드러날 때가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령한 너희’는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짐을 서로 지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신령한 사람이라면, 신령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연약함의 짐을 대신 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얼만큼 내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의 짐을 질 수 있는가, 그것이 성령충만의 척도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죄의 짐까지 기꺼이 함께 질 수 있는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우월감, 혹은 열등감이 나를 지배하려 할 때 우리는 복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 앞에서 실수하고 죄가 드러난 사람을 대할 때도 우리는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 ‘나도 이 사람 만큼이나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자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 ‘이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헛된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바라기는 헛된 영광을 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서로의 짐을 지는 새로운 목표를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삶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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