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2019년 9월 14일 이익환 목사
이사야서 1 예언자의 사명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2-4)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추석 연휴가 지나고 있다. 화상통화로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추석인사를 드렸는데, 장인 어른은 유창이에게 이런거 먹어봤냐고 송편을 보여주셨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추석 민심’이란 말이 있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가 만나 나누는 이야기가 여론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명절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정국의 변곡점으로 불리기도 한다. 추석에 형성되는 여론에 따라 정치의 국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올 추석의 화두는 단연 ‘조국’이다. 조국 때문에 이처럼 조국의 운명을 걱정해본 적이 처음인 것 같다. 조국 때문에 이처럼 좌우 이념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는데 과연 추석 이후 민심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갈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부터 이사야서 강해를 시작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던 선지자였다. 민심보다는 천심에 주목했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세상을 향해 말했던 자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곧 역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강해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야를 얻게 되길 기도한다.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다. 기원전 740년의 일이다. 그리고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걸쳐 약 55년간 선지자로 사역한다. 기원전 740년은 디글랏 빌레셋이 이끄는 앗수르가 새로운 제국으로 힘을 확장하던 때였다. 남쪽에는 애굽이 여전히 제국으로 건재하고 있어서 유다와 같이 작은 나라는 어디에 붙어야 안전할까 줄타기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사야는 시대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강대국 사이에서 어디에 줄을 서야 국가의 안위가 보장받을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도자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할 때라고 그는 말한다. 사 1:2-4,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국가 통치자들은 항상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며 그것을 통계로 입증하길 원한다. 웃시야는 유다 왕국을 52년간이나 다스린 왕이었다. 그의 통치를 통해 남유다는 군사적으로나 정치 경제 면에서 안정된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이사야의 관심은 국가와 개인의 안정과 번영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친 유다는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었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다’는 것이 당시 이사야의 진단이었다.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 놓고 유다를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 이미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 증거를 삼으셨다. 신 4:26절,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하늘과 땅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행위를 감찰하는 공간인 것이다. 위정자들이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속임수로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진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것이다. 무서운 것이다. 사 1: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을까? 하나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어떻게 권력자 앞에서 겁없이 이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친다. 사 1: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소돔과 고모라는 풍요로웠던 도시였다. 그러나 그 도시는 그 풍요 때문에 타락했고 죄가 관영했던 도시였다. 그 도시는 침략군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사야는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을 향해 ‘소돔의 관원’이라고 부른다. 저주도 그런 저주가 없다. 이사야 승천기에는 거짓 선지자 벨키라가 므낫세 왕 앞에서 이사야를 비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이여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소돔이라 부르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지배자들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이사야는 므낫세 왕 앞에서 톱으로 잘려 죽게 된다. 히브리서에서도 언급하는 톱으로 켜서 죽은 믿음의 사람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왕의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슬픈 하나님의 마음을 전한다. 사 1:13-15,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은 악을 도모하는 지도자가 크리스천이라고, 교회다닌다고 봐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들은 헌금도 잘 내고 예배도 열심히 드렸을 것이다. 예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는 분리된 그들의 일상이었다. 손에 피흘림이 가득한 그들의 일상, 그들이 갖고 있는 힘으로 가난한 자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하는 그들의 일상이 문제였다. 일상으로 연결되지 않는 종교 행위에 하나님은 질리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자의 삶은 일상에서 정의와 공의로 나타나야 한다. 미슈파트와 체다카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두 가지 삶의 원칙이었다. 아무리 성회로 모이고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도 일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사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신실하던 성읍 시온이 아무리 번영을 누린다 해도 거기에 정의가 없고 공의가 없다면 하나님의 눈 앞에는 창기로 보일 뿐인 것이다.
시온이 안전한 것은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통치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의와 정의의 길을 포기할 때 시온은 언제라도 무너질 성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은 반드시 일상에서 정의와 공의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웃을 압제하고 불의를 방관하거나 앞장서서 꾀하는 삶에서 돌이켜 고아와 과부,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신원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삶인 것이다. 사 1: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선지자의 시선은 심판으로 인한 패망과 멸망에 머무르지 않는다. 시온이 다시 정의와 공의로 구속받는 회복에까지 확장된다. 이것이 무너져야 할 것을 무너뜨리고 세워야 할 것을 세우는 예언자의 사명인 것이다.
교회와 성도는 시대 앞에 예언자로서의 사명이 있다. 신앙을 개인구원의 차원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내가 구원 받고, 복을 얻는 것,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구현되야 한다. 나라의 전망이 좋지 않다. 시대가 어둡고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도 지극히 개인적인 안위와 번영을 구하는 것으로 축소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정의과 공의의 길을 내팽겨치고 세상과 똑같이 시대의 우상 앞에 절하고 타락해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슬퍼해야 한다.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이 시대와 사회 앞에 예언자로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 천심을 전하는 자로 서야 한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과연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봐야 할 때다. 바라기는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 사회와 세상속에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