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3 예언자의 노래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9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이사야서 3 예언자의 노래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

부정한 청탁과 위조 사실 때문에 조국이 시끄럽다. 김웅 검사의 ‘검사내전’이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재벌 체제에서는 엄격한 지배와 피지배 속에 청탁과 특혜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재벌’과 ‘김영란법’이 공존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김영란법은 한마디로 청탁금지법이다. 일가친척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식사는 3만원, 선물은 5만원, 경조사비는 10만원 이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연료는 시간당 최고 100만원 이하로, 그리고 1년에 300만원을 넘게 금품을 주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다. 우리나라에 얼마나 부정한 청탁이 관행이 되었기에 그러한 법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검사의 지적은 우리나라 정치권력은 재벌에게 혜택을 베풀며 김영란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래를 받아낸다는 것이다. 큰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자신들이 하고 있는 청탁은 청탁이 아니라 정책이며, 정권을 유지하는 무기로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에는 예언자의 노래가 나온다. ‘포도원의 노래’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부르고 있는 노래다.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며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사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을 위해서 노래를 시작한다. 상당히 낭만적인 시의 내용이 기대가 된다. 사 5:1-2,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사랑하는 자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얼마나 애지중지 가꾸었는지 알 수 있다.이어지는 내용을 보자. 2절,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좋은 포도를 기대했는데 악취가 나는 썩은 포도가 맺어진 것이다. 사랑과 기대로 시작된 포도원의 노래는 너무도 갑자기 실망으로 끝을 맺고 만다. 사랑하는 자의 실망은 분노와 심판으로 이어진다. 사 5:5-6,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예언자는 이어서 노래의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이 포도원의 노래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삶의 열매는 정의와 공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기대하셨던 열매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으로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슈파트(משפ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것은 ‘미슈파흐(משפח),’ 압제와 포학이었다. 공의는 히브리어로 ‘쩨다카(צדקה)’다. 그런데 그들이 맺은 것은 ‘쩨아카(צעקה)’였다. 울부짖음이었다.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쏙쏙 박히는 말이었다.

시편 80편 8절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이다.자, 그러면 가나안 땅에서 벌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실상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는 여섯 개의 화가 선포된다. 첫번째 화다. 사 5: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스라엘 사회에서 원래 토지는 지파별로 할당되어 유전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기에 사고 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에서 소수 권력층이 땅과 가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토라가 무너진 것이다. 문제는 권력계층이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란 사실이다. 사 3: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구약에서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포도원을 빼앗는 사건이 나온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욕심을 낸다. 돈을 줄테니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그러나 나봇은 그것이 내 조상의 유산이고 하나님이 왕에게 주기를 금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거절 당한 아합왕은 바보같이 집에 와서 밥도 안먹고 침대에 눕는다. 그 꼴을 본 아내 이세벨이 꾀를 낸다. 그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청탁의 편지를 쓴다. 불량배 두 명을 고용해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할테니 그를 돌로 쳐죽이라는 것이다. 신명기 17장 6절에 의하면 사람을 돌로 쳐죽일 때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요구되었다. 또한 레위기 24장을 보면 하나님을 저주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나와 있다. 이세벨의 음모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아합왕은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한다. 그들은 토라의 율법을 피흘림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권력자가 새로운 법안을 만들 때 그것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며  약자를 피흘리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주목해야 한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주택부자 상위 10명은 평균 703채에 달하는 집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상위 1%가 갖고 있는 부동산 총액은 55% 이하 중하위 계층 전체가 보유한 부동산과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사야는 토지부자들에게 선포한다. 사 5:9-10,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열흘 갈이 포도원은 황소로 열흘 동안 땅을 갈아야 하는 크기의 포도원이라는 말이다. 약 12000평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 넓은 포도원에서 겨우 포도 한 바트, 즉 한 바구니를 거둔다는 말이다. 한 호멜은 10에바인데,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서 한 에바를 거둔다는 것은 10분의 1만 수확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의가 아닌 포악이 심어진 곳에 재앙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화가 나온다. 사 5:11-12,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향락에 빠져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이다. 그 결과 백성들은 사로잡힐 것이고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고 예언한다.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는 권력자들이 향락에 취한다면 일반 백성들은 그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번째 화다. 사 5: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죄악을 끄는 자는 정직할 수가 없다. 반드시 눈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말한다. 그들은 권모술수로 백성들을 속이고 자기 이익을 취하기에 능숙하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성경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유물로 취급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조롱한다. 사 5: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면 해보시라는 것이다.

네번째와 다섯번째 화다. 사 5:20-21,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거짓을 일삼는 권력자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에 빠져 스스로 잘난 체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다.

마지막 여섯번째 화다. 사 5:22-23,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뇌물이 있는 곳에 악인이 번성한다. 그리고 의인은 피눈물을 흘린다.

정의와 공의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고 썩어서 냄새나는 들포도가 열리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현실인 것 같다. 사람들의 탐욕이 하나님의 기준을 몰아내고, 이 사회를 압제와 울부짖음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 모든 불의에 대한 심판자가 하나님이심을 노래하고 있다. 사 5:24-25,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무서운 것이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은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돌이키게 하기 위함이다.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현실 앞에서 회개 해야 한다. 비리가 드러난 소수 권력자들을 비난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는 운명공동체로 엮겨져 있다. 우리 사회에 들포도가 가득하면 함께 망하는 것이다. ‘이번 한번쯤 괜찮겠지’ 하면서 죄와 불의의 씨앗을 심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청탁을 통해, 거짓 위조를 통해 공력없이 쌓은 성은 반드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상품 포도나무로 이 땅에 심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극상품의 열매를 우리의 삶 속에서 맺어야 한다.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포학과 울부짖음의 열매를 맺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예언자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하나님이 불면 먼지처럼 사라지고 마는 게 우리 인생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기대가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 정의와 공의의 열매맺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