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예배_ 초막절 코드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2019년 10월 12일 이익환 목사

추수감사예배_ 초막절 코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레 23:34)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있다. 성경은 그것을 ‘여호와의 절기’라고 말한다. 히브리어로는 ‘모에드(מועד)’인데, ‘정해진 때’라는 뜻이다. 절기는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공휴일이 아니다. 절기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정하신 하나님의 시간이다. 예수님은 일년 중 어느 때라도 십자가에 달리실 수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유월절에 일어났다.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사망의 세력이 넘어갔던 구약의 유월절과 같은 때에 일어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어느 때라도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가신 뒤 삼일 후에 부활하게 된다. 이 날은 구약에서 초실절을 지키는 날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이다. 성령의 오심도 일년 중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오순절, 아버지가 약속한 것을 선물로 주는 때에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절기들을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열심히 이 절기들을 지킨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은 이 절기들을 문자 그대로 다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절기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들을 잘 기억하고 지켰을 때 그들에게는 부흥과 치유와 기쁨의 회복이 있었다. 그래서 이 절기들은 과거로 끝난 사건들이 아니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적용했을 때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제 내일부터 초막절이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을 왜 지키라고 하셨을까? 오늘은 초막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code)를 살펴보려 한다. 우리의 현재를 새롭게 할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초막절 코드, 첫번째는 ‘초막’이다. 초막은 히브리어로 ‘수콧(סכות)’이다. 레 23:42-43,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일주일동안 초막에 사는 게 어떤 효과가 있을까?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일주일이 아니라 40년 동안 초막에서 살았다. 그리고 초막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실제로 목격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 안에 있다가도 구름과 불기둥이 성막 위에서 떠오르면 초막을 거둬 이동해야 했다. 그들이 만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임재였다.그래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초막절을 통해 기억하길 원하셨다. 그래서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초막에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음을 자녀들과 추억하는 날이다. 단지 추억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지금 그들의 삶에도 일상적인 체험이 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날인 것이다.

우리는 한 해를 살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감정에 더 자주 사로잡힌다.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불만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남들이 소유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감사를 잃어버린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표정으로 장막에서 살고 있는가? 초막절은 불만과 슬픔의 장막을 거두고 기쁨의 장막에 살라는 초대다. 허름한 초막 안에 누우면 내가 남들보다 더 갖고 덜 갖은게 중요하지 않다. 광야와 같은 시절도 이러한 장막을 치고 통과했음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붙잡게 되는 것이다.

초막은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초막은 한 자리에 눌러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라고 하시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언제든지 재배치할 수 있는게 초막이다. 초막에서 우리의 인본주의는 발동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기준, 신본주의만 남게 된다. 초막은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내가 움직이겠다’는 절대 신뢰의 상징인 것이다. 초막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나그네길임을 알게 된다. 잠시 텐트치고 지나가는 곳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초막에서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집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도 허름해보이는 초막은 영원(eternity)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여러분의 삶이 소유하고, 쌓아놓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동할 수 있는 삶이 되길 바란다. 많은 것을 쌓아 놓고도 정작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는 곳이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초막이 되길 바란다.

초막절 코드 두번째는 ‘광장’이다.느 8:16-17,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느헤미야 당시 수문 광장 앞에 대형 초막이 세워진다. 본문을 보면 초막절이 여호수아 때부터 느헤미야 때까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명하신 초막절을 지키지 못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상실한 채 약 95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 사이 그들은 나라의 멸망을 경험했다. 물론 다시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기쁘지 않았다. 진정한 영적 재건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말씀에 정통했던 학사 에스라를 준비시키셨다. 나팔절에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책을 펼쳤다. 그가 율법 두루마리를 펼칠 때 온 백성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선포되는 에스라의 말씀을 ‘아멘 아멘’으로 받았다.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바로 해석되어졌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났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울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고,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는지 깨달았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에스라와 함께 율법을 더 자세히 알고자 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자신들이 초막절을 지키지 못했음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온 성읍에 초막을 지으라고 공포하게 된다.

부흥은 포로시기가 끝났다고 저절로 오지 않았다. 부흥은 성전이 다시 건축되고, 훼파된 성벽이 완공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오지 않았다. 부흥은 덮어두었던 성경이 열리고 그것이 지켜졌을 때 비로소 찾아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진동시킬 때, 사람들의 심령에 기쁨이 회복되며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러분도 부흥을 원하는가? 기쁨이 회복되길 원하는가? 성경을 열어야 한다. 읽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초막절은 광장에서 말씀을 회복한 날이다. 그리고 영적부흥과 기쁨을 온 백성이 함께 회복한 날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광장에서 많은 국민들이 울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분노를 쏟아내는 자리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회복되도록, 다시 말씀 앞으로 온 백성이 돌아가는 자리가 되야 할 것이다. 온전한 회개와 돌이킴이 있을 때 기쁨은 회복된다. 초막절은 개인의 장막에서 개인의 회복만을 위한 날이 아니다. 온 백성이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회복하는 날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쁨이 한국 사회 안에 회복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초막절 코드 마지막은 ‘물’이다. 성전시대에 제사장들은 초막절 기간 동안 매일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했다. ‘심핫 베이트 하쇼에바(השואבה בית שמחת)’ (The Joyous Water-Drawing Ceremony)라는 의식이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적당한 비를 주시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성전 뜰에서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물을 붓는 의식을 지켜보며 즐거워 했다. 랍비 문헌인 미쉬나를 보면 ‘물을 붓는 즐거운 의식을 지켜보지 않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전혀 즐거움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막절 기간 특히 마지막 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다. 사람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수금과 비파와 심벌즈와 나팔을 불며 춤추고 노래했다. 대제사장이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 위에 부을 때는 백성들은 성전을 향해 서서 이렇게 함께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으며 우리의 눈은 주를 향하나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이 성전뜰에 등장하신 것이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제사장들은 놀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수의 강’은 원어적인 의미로는 ‘생명의 소나기의 강’이다. 에수님은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배에서 흘러나올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여기서 ‘배’는 헬라어로 ‘코일리아’다.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 영혼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영혼 깊은데서 생명의 소나기의 강이 흘러 나오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생명의 소나기가 부어져야 가뭄이 끝나고 풍년이 온다. 생명의 소나기가 부어져야 인생의 목마름이 끝나고 영혼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생명의 소나기의 강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사도 요한은 그것이 성령이라고 말한다.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자,이것이 바로 초막절의 본질적인 약속이다. ‘초막절에 너희가 간절히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가 사모하는 너희에게 성령을 부어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인 것이다.

성령을 부어주겠다는 약속은 구약 선지자들의 반복적인 주제였다. 이사야가 말했다. 사 44: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요엘 선지자도 말했다. 욜 2:23, 28-29,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다” 이 약속이 오순절 때 이루어진다. 늦은 비가 내리는 오순절에 성령이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비처럼 내린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천하만민,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는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겠다는 약속은 이제 초막에서 광장을 지나 온 열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은 그냥 부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모할 때, 간절히 원할 때 부어지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 남아 간절히 기도했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성령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의 실재가 되게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목마름을 가지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믿는 우리들이 장차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장막이 있음을 말한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은 구약시대 끝나버린 절기가 아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나팔소리는 아직 울리지 않았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는 초막절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 초막절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다. 초막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삶의 장막에서 ‘하나님 한분이면 된다’는 고백이 회복되길 원하신다. 초막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사회 광장에서 공동체적인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초막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삶의 메마른 곳에서 성령의 생명의 능력이 강같이 흐르게 되길 원하신다. 바라기는 이러한 초막절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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