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0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이사야서 5 예언자의 믿음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0-14)
세계 최고의 지성인을 만들어내는 하버드대학은 원래 청교도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대학이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게 1620년이었다. 그 후 16년 뒤인 1636년에 하버드대학이 설립된다. 초창기 학교의 모토는 “Veritas Christo et Ecclesiae,”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진리’였다. 학교의 상징 로고를 보면 진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veritas’가 세 권의 책에 나뉘어져 쓰여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래 책은 뒤집어져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고, 오직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임해야 알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 세번째 책이 위로 열려 있다. 그리고 ‘Christo et Ecclesiae’라는 표현도 사라졌다. 그만큼 세속화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없이 인간 지성으로 다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대학이 이런 지식인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성경은 말한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차원이 다른, 더 높은 곳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계시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인간의 합리주의와 이성을 뛰어 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는 합리주의자와 믿음의 사람의 대결이 나온다. 바로 아하스왕과 이사야 선지자의 대결이다. 이 대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사 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당시 앗수르는 절대패권을 가진 제국이었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은 군사기지와 상업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쪽으로 군사원정을 시작한다. 기원전 735년경의 일이다. 이 때문에 당시 이 지역의 맹주였던 아람왕은 북이스라엘왕과 함께 동맹을 맺고 반앗수르 전선을 형성한다. 그러나 남유다는 요담 왕 때부터 친앗수르 노선을 걷는다. 그리하여 동맹국인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를 침공한다. 이에 요담왕이 죽고 그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된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왕이 바뀌었기에 아하스왕에게도 동맹을 제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요구를 거절하자 그들은 남유다를 다시 공격한다.
성경은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대하 28:5-6,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하루 아침에 남유다의 용사 12만 명이 죽고, 20만 명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다. 자 그런데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가? 역대기 기자는 그것을 국제정세라는 현실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로 기술하고 있다. 즉 아하스왕이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셨다는 것이다. 반앗수르 동맹이라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넘어 그 위에 하나님의 생각과 작정이 실제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아하스왕은 남유다에서 므낫세왕과 함께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는 바알의 우상을 만들고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몰렉제사를 부활시킨다. 당시 세상 문화에서 유행하는 대세를 따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불신앙을 전쟁을 통해 심판하신 것이다.
사 7: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미 한차례 침략을 당했던 남유다는 또다시 침공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두려움에 흔들리게 된다.
당시 아하스왕은 성밖에 있는 샘의 물을 끌어들이려고 했는지 수로 끝에 나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가 어디 있는지, 그의 모든 앉고 일어섬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이사야에게 그를 만나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게 하셨다. 사 7:3-4,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르신은 아람왕의 이름이다. 르말리야의 아들은 ‘베가’로 북이스라엘의 왕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부지깽이가 뭔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쓰는 막대다. 거기에 불이 붙을 때도 있지만 곧 꺼져서 연기가 나곤 한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기세는 지금 불로 남유다를 삼킬 것 같지만 실상은 연기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 7:5-8,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이 예언은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된다. 베가는 3년 뒤인 기원전 732년 호세아에 의해 암살당한다. 같은 해 아람의 수도 다메섹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만다. 그리고 기원전 670년경 앗수르는 외국인 포로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며 통혼 정책을 시작한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다시 독립국가로 서지 못하게 된다.
현실주의자 아하스왕에게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그들을 삼킬 수 있는 불이었다. 그리고 그 불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큰 불인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믿음의 사람 이사야는 현실을 다르게 파악했다. 그에게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연기나는 부지깽이 막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 그리고 통계나 합리적인 상식과 상관없이 행동한다. 믿음의 사람 이사야의 결론은 이렇다. 사 7:9,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임 로 타아미누 키 로 테아메누, תאמנו לא כי תאמינו לא אם) 여기서 동사 ‘아만(אמן)’이 다른 형태로 쓰였다. 아만은 ‘세우다, 믿다’라는 뜻이다. ‘믿는다’는 말 ‘아멘’이 여기서 나왔다. ‘תאמינו לא אם (임 로 타아미누), 너희가 믿지 않으면’, 히필형이다. תאמנו לא כי (키 로 테아메누), 정녕히 서지 못하리라’, 니팔형이다. 선지자는 워드플레이를 통해 이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굳게 믿어야 나라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세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다. 개인에게도 많은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보통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보게 된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을까?’ 위기 속에서 누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에 차이가 난다. 부정적인 전망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만을 생각하게 한다. 연기가 나서 우리의 눈이 매울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연기 나는 막대를 우리를 위협하는 큰 불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현실을 기준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전망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전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왕에게 이렇게 제안하신다. 사 7:10-11,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하나님은 정말 인내심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그 악한 왕 아하스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아하스의 반응은 하나님의 기대와 달랐다. 사 7: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것은 믿음의 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야의 제안은 ‘하나님이 보여주실 작은 싸인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징조를 통해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사야의 제안을 아하스는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과 정치적 판단을 믿겠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더 큰 불, 앗수르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대하 28:16, 20-21,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이걸 바둑 용어로는 자충수라고 한다. 스스로 행한 행동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물론 이 원정을 통해 아람왕국은 무너진다. 아하스는 자신이 원했던 눈 앞의 결과는 얻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유다로서는 연기나는 부지깽이를 치우고, 더 크게 불붙어 나라를 삼킬 수 있는 나무를 눈 앞에 가져다 놓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의 선언에 이사야가 말한다. 사 7:13-14,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는 아하스를 한 개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다윗의 집으로 보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따라서 아하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지 않으면서 믿음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다윗에게 왕조 언약을 주셨던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그리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한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이라 이름하는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많은 견해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 언약을 성취하셨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이사야서 7:14절의 성취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에서 이 징조의 핵심은 아이가 누구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가 징조가 되어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사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유대인들은 아들의 성년식을 13세에 한다. 그 나이가 되면 선악간의 도덕적인 결정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13세가 되는 해인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모두 위기 상황을 지난다. 학업의 위기, 회사의 위기, 가정의 위기, 국가 존립의 위기를 지날 때가 있다. 국가 존립의 위기 속에서 이사야는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고 도전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싸인을 구해야 한다. 아하스왕처럼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인적적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싸인을 봐야 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전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계시의 창을 통해 믿음의 눈으로 현상을 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상을 보되 그 현상 너머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아야 한다. 문제와 위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숨겨져 있다. 위기는 고통스러운 것 같으나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기는 단지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위기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본질인 것이다. 이 본질을 붙들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위기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과 하나님의 기준에서 빗나간 것이 있다면 돌이키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다 열려져 있지 않고 일정 부분 닫혀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싸인을 구하고 그 징조대로 움직이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결국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라기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며 믿음으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