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 자유와 책임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0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 자유와 책임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1-2)

휴가를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퇴근 시간이나 근무 시간 등을 체크하지 않는 회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회사가 있다. 넷플릭스(Netflix)다. 넷플릭스의 기업문화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자유와 책임’이다.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회사 로비에는 자판기들이 있다. 여기에는 마우스, 이어폰, 각종 연결선, 멀티포트, 건전지, USB 등이 들어있다. 자판기지만 돈은 받지 않는다. 스스로 필요한 만큼 알아서 자유롭게 쓰라는 의미다. 넷플릭스의 ‘자유와 책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다. ‘휴가’제도다. 직원이 원하는 만큼 휴가를 쓸 수 있다. 리더급 임원부터 6주간의 긴 휴가를 솔선해서 다녀온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맡은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출장비, 선물비용, 기타 비용 지출에서도 ‘자유와 책임’이 나타난다. 회사는 “넷플릭스의 이익에 최선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라”는 규율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알아서 적절히 회사돈을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가 진짜 무서운 회사다. 주어진 자유만큼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바로 짤리기 때문이다. 이런 회사가 한국에 있다면 잘 돌아갈까? 글쎄, 만들어가기 나름인 것 같다.

오늘은 토라포션 첫번째 시간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여섯째날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기로 결정하셨다.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그뿐만이 아니었다. 1:29-30,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지면의 맺는 모든 채소와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하나님은 온 세상을 무한리필 가능한 자판기로 만드셨다. 인간에겐 그야말로 무한 자유가 허락되었다. 다만 한가지 책임이 따랐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리의 최초의 조상은 그 책임을 지키지 못했다. 그 결과 낙원을 잃어버렸다. 남자는 평생 땀흘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여자는 임신의 고통과 평생 자식 뒷바라지에 남편을 따라야 하는 운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꼬여버린 세상에 태어났다. 이 세상에 태어난게 고통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인가? 우리에게 남은 자유는 무엇일까? 죄로 뒤틀려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엇인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늘에 새와, 땅에 짐승들과, 바다의 고기들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봐이야르 엘로 힘 키 토브, טוב כי אלהים וירא).”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의 키워드는 ‘좋았더라(토브, טוב)’이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세상은 정말 좋았다. 거기엔 힘의 남용이나 권력의 횡포나, 무력 정복과 같은 모습이 없었다. 여섯째 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창조의 모든 사역을 마치셨다. 창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토브 메오드, מאד טוב) 다른 날은 그저 ‘좋았더라(토브)’로 끝났는데, 여섯째날 인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은 ‘심히 좋으셨다(토브 메오드)’. 왜 이날은 심히 좋으셨을까? 6일 근무 끝내고 쉴 수 있었기 때문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창 5:1-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담(אדם)’이다. 아담은 ‘알레프(א)’와 ‘담(דם)’이 결합된 단어다. ‘알레프(א)’는 ‘엘로힘(אלוהים)’, 즉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어다. ‘담(דם)’은 ‘피’라는 뜻이다. 레위기 17장 11절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담’이란 말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존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존귀하시기에 인간은 모두 존귀한 것이다. 인종이나, 문화나, 종교의 차이 때문에 이 존귀함은 훼손될 수 없다. 창세기에서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자연을 향해 주어진 것이지 다른 사람이나 국가를 향해 주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토라포션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홍수심판으로 처음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것을 작정하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이 ‘선악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에덴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동산에 두 나무를 두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였다. ‘금지할 금(禁)’자는 나무 목자 두 개(林)와 보일 시(示)자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두 나무에 대해서 지시하신 것을 말한다. 왜 두 나무일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살고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상징이었다. 생명나무는 아담의 공급자로서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담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먼저 먹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선악과를 먼저 선택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심각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게 된다. 그들에게 수치와 두려움이 임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린다. 하나님은 숨어 있는 아담을 부르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Where are you?)”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이 대답한다.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와도 답한다. 창 3:13,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역시 내가 안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 일로 에덴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더 심각한 일이 이 불순종의 결과로 벌어졌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와 사망이 이 세상에 합법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최초의 사람이 하나님 아닌 사탄에게 순종한 결과다. 그리하여 낙원을 상실한 것은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 즉 우리들의 실존이 되버린 것이다.

이후 아담은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는다. 세월이 지난 후 가인은 농사를 지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을 길러 제물을 드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이 일로 가인은 화가 나서 동생을 쳐죽인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있느냐(Where is your brother?)” 질문하신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는 말이다. 내가 중요하지, 자기 동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서두는 이처럼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으나 책임을 지는 것에 실패한 두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임을 지는 것이 왜 중요한가? 특히 에덴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보시기에 너무 좋았던 처음 창조를 다시 회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덴을 회복하기 원하신다. 어떻게 회복하시는가? 책임지기로 순종하며 자원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회복을 진행하시는 것이다. 홍수 이후에도 인류는 힘을 잘못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바벨탑을 건설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반역하는 인류를 위해 순종하는 한 사람을 일으키신다. 그게 아브라함이다. 그게 모세였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연약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세워가셨고 리더로 만드셨다. 그들이 순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더는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부담을 함께 책임지기로 결정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 때문에 이 일이 벌어졌다”고 책임전가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또한 “내가 왜 다른 사람의 문제에 까지 신경을 써야 해?”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내가 그들을 지키는 자냐”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행동에 나서길 기다린다. 그러나 뭔가 잘못된 것에 함께 책임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자들이 바로 리더다. 그들이야말로 죄로 파괴된 세상을 고치고, ‘티쿤 올람’이라는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8:19-20, “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여기서 ‘허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마타이오스테’이다. 전도서에서 ‘헛되다’라고 표현되는 말이다. 2:11, “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손으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손으로 하는 모든 수고가 내 손에 잡아 둘 수가 없음을 느낄 때 우리는 허무해진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생은 허무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헛되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 안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이 땅을 경작하고 다스려주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처음 창조된 그 모습 그대로, 이 세상을 보기에 좋은 곳으로 재창조하는 사람들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는 질문은 하나님이 아담에게만 하신 질문이 아니다. “네 동생이 어디있느냐(Where is your brother?)”는 질문 역시 하나님이 가인에게만 하신 질문이 아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요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 초청에 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회복사역에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자유’는 ‘헤룻(חרות)’이다. ‘책임’은 ’아하라욧(אחריות)’이다. ‘자유(חרות)’라는 단어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알레프(א)’가 결합된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세우신 것은 그들이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심이다.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책임있게 일어설 자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소명에 응답하여 서는 자에게 함께 하실 것과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사 43:1-2,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자유를 위해 책임을 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한 그의 소유로 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된 사람을 막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출애굽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했을 때 “심히 좋았더라”고 외치신 하나님의 처음 창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까이서 경험하는 사람들은 ‘심히 안좋을 수 있다’ (로 토브 메오드). 그러나 우리는 각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목적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회복을 도와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남용하지 않고 책임있는 자로 살아가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죄 많은 이 세상에서도 에덴은 회복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책임있게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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