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1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 미리 보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인간의 명령에 저항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이 만들어졌다. ‘쉐이퍼’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유튜브영상:1:44-3:21). 자율판단 의지를 가진 로봇이 어디까지 진화하게 될까? 2017년 골드만삭스는 600명 가량의 주식 트레이더를 2명만 남기고 해고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 켄쇼 Kensho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15명이 4주 동안 해야하는 분석을 단 5분 만에 처리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노동시장의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 옥스포드 대학의 ‘고용의 미래’보고서는 20년 내에 현재 직업의 47%가 사라진다고 전망한다. 기술 자본가들은 화려하고 편리한 테크노피아를 연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전에 없던 생존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내 직업은 사라지고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자녀들은 앞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뭐 이런 걱정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야 할까?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미래였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는다. 너무도 큰 테스트였다.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그의 미래는 불확실성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나뿐인 아들 이삭이 사라지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라는 그의 부르심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는 이 불확실한 순간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리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는 ‘히네니(הִנֵּֽנִי)’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준비한듯, 그는 대답한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모리아는 예루살렘에 있는 땅이고, 후에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 ‘모리아’는 ‘보다’라는 뜻의 ‘라아(ראה)’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모리아는 ‘여호와께 보여지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 가나안 땅에 온지 25년 만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약속의 열매였고, 그의 미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신다. 번제는 불로 태우는 제사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삭에게 있는데, 이삭을 태운다면 하나님의 약속도 불타 없어지게 된다. 또한 자신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부르심도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과 모순되는 명령이다. 인공지능 ‘쉐이퍼’가 이 명령을 받았다면 그는 그것을 거부하며 울었을 것이다.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주시더니, 이제 그를 번제로 죽이라구요.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입니다. 실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울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순되는 명령을 왜 아브라함에게 했을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러 가라고 명령(레크 레카)했을 때 아브라함은 의외로 주저함없이 바로 떠난다.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운다. 그리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모리아산을 오른다. 그 때 이삭이 아브라함을 부른다. “내 아버지여”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있노라.” 그는 하나님께 대답했던 것처럼 그의 아들에게도 ‘히네니(הִנֵּֽנִי)’라고 응답한다. 이 장면을 보면 아브라함은 정말 좋은 경청자임이 분명하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보통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바쁘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응답했던 것처럼 아들에게도 응답한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잘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 이삭이 질문한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으로선 참 뜨끔한 질문이었다.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창 22:8,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God will provide a sheep for the burnt offering, my son!” 원어로는 “엘로힘 이르에 로 하세 레올라 베니(בנ לעלה השה לו י יראה אלהים)”다. 그런데 ‘이르에’의 기본형은 ‘라아(ראה)’다. ‘본다’라는 뜻이다. ‘본다’라는 동사를 한국어로는 ‘준비하다’, 영어로는 ‘provide’로 번역했다. 그런데 ‘provide’는 ‘pro video’라는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to see before” ‘미리 본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미리 볼 수 있는 분이기에 준비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다. 그는 25년동안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가 자신보다 앞서 보시고, 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경험했던 것이다.
창 22:8-10,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은 의외로 단호했다. 그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행동은 그의 마음 속에서 벌어진 갈등을 이미 해결하고 난 다음에 나온 것이다. 좀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에는 모순이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순간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랍비 조너던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The trial of the binding of Isaac was not about sacrifice but about uncertainty. Until it was over, Abraham did not know what to believe, or how it would end. He believed that the God who promised him a son would not allow him to sacrifice that son. But he did not know how the contradiction between God’s promise and His command would resolve itself.” ‘이삭을 바치는 시험은 실제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이 끝날 때까지 그것이 어떻게 끝날지 몰랐다. 그는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희생하도록 하지 않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명령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해결될지는 몰랐다’ 이것이 삭스의 주장이다.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히브리서를 보자.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믿었다. 죽은 태를 열고 생명을 주셨던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그는 믿은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명령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자신을 인도해오신 신실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이 모순을 해결하리라’ 그는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더 큰 믿음의 사람만이 세상의 상식을 뒤엎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이 땅에서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번엔 천사가 아브라함을 부른다. 그는 이 때에도 “내가 여기있나이다”, ‘히네니(הִנֵּֽנִי)’라고 응답한다.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시험이란 다름 아니라 세상에 순응하라는 목소리다. 신앙을 타협하라는 유혹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이 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려면 우리는 나의 논리와 세상의 상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신앙의 승패는 듣는 것에 달려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창 22:12,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자신이 약속으로 받은 축복마저도 하나님의 최종 명령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믿음이었다. 세상의 빅데이터를 담고있는 인공지능은 그런 요구를 하는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명령을 거부했을 것이다. 이것이 인공지능로봇과 믿음의 사람의 차이다. 믿음의 사람은 데이터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장차 그분이 친히 준비하실 어린 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사도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하나님을 인류를 구원할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시고, 그의 아들을 친히 준비하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브라함 사건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יראה יהוה)’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보신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모리아 땅에서 먼 인류의 구원을 미리 보고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후에 이 모리아땅 언덕에 성전이 세워지게 하셨다. 그리고 이 모리아 땅 언덕 위에 그 아들의 십자가가 세워지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가운데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처벌하셔야 했다. 이 모순을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이심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미리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길을 잃은 곳에서 피할 길을 보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가 죽을 것 같은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미래학자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시점, 즉 싱귤레리티(singularity)가 2045년쯤 오게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앞으로 25년 뒤다. 바벨탑을 내려다보고 계셨던 하나님, 아브라함을 모리아땅으로 보내셨던 하나님, 그리고 그 땅에 십자가를 세우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 역시 미리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리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고전 10:13)
시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역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다. 그러나 이미 확실한 길을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불확실하고 불안한 곳일지라도 하나님 한 분에 대한 확신만을 갖고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장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다. ‘히네니(הִנֵּֽנִי)’ “내가 여기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이렇게 들을 준비를 하며 하나님 한분의 목소리를 따라 살 때 우리는 삶의 모순같은 순간을 돌파해낼 수 있는 것이다.
창 22:16-18,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권세가 주어진다.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 또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를 통해서도 이 말씀은 이루어진다.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앞으로 어떤 시대가 다가온다해도 믿음으로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