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1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5_ 82년생 김지영과 사라의 일생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창 23:1)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나왔다. 1982년에 태어나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성차별을 겪으며 살았고, 아이를 낳은 뒤 육아를 홀로 맡게 된 경력단절 여성 김지영씨의 이야기다.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남편과 같이 영화를 보고나서 싸울뻔 했다는 후기를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내를 위해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공유같은 남자가 있음을 보고 많은 결혼한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과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을 쓴 조남주 작가 역시 10년간 MBC ‘PD수첩’ ‘불만제로’ 작가였는데, 출산하며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이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개인의 선택이지만 사회 문제이기도 한데요. 여자들이 결혼하기 싫어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는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이 질문에 조남주 작가가 대답한다. “맞벌이 가정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보면 남성이 40분, 여성이 3시간 14분으로 (통계청, 2015 일, 가정양립지표) 여성이 남성의 다섯 배입니다. 이 수치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해요. 직장생활과 가사(육아)를 병행할 수 없는 구조에서 가사 노동이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여겨진다면 여성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요.” 여기서 ‘가사노동’이란 표현이 나온다. 영어로는 domestic labor.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이란 책에서 사용된 단어다.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의 기초가 되는 책들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한 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사라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표현하며 존경한다. 사라는 평생 남편을 따라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노년에 아들 이삭을 낳아 기르다가 죽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성경은 이 한 여인의 삶을 주목하고 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다. 그런데 사라는 성경에서 죽을 때의 나이가 기록된 유일한 여성이다. 사라의 삶을 살펴보며 한 여성이 어머니로 살아가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사라는 창세기 11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창 11: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그녀는 임신하지 못해서 자식이 없는 여인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라의 인생 비전,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창 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은 이 비전을 사라의 나이 89세에 확인해주신다. 그녀의 비전은 단지 아들을 낳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그녀의 나이 90세에 이루어진다.
사라는 65세에 가나안으로 떠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남편과 함께 믿음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사라는 어머니가 될 때까지 가나안 땅에서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90세가 다 되어 아들을 낳을 것이란 소리를 듣고, 사라는 그 상황이 웃겼던 것 같다.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לי יצחק השמע כל)” 그래서 사라는 아들의 이름도 ‘그가 웃을 것이다’라는 뜻인 ‘이삭(이쯔학, יצחק)’이라고 짓는다.
유대인의 전승을 기록한 미드라쉬는 사라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의 장막에 있었고, 집문은 넓게 열려 있었으며, 그녀는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사라는 무더운 날 나타난 세 명의 나그네를 위해 떡을 직접 반죽하여 대접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노동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대가로 지불되어야 할 행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환대였고 기쁨의 섬김이었다. 사라의 장막은 이처럼 사람들을 환대하는 공간이 되었다.
탈무드는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서나 다 계실 수 없어서 가정에 어머니를 보내셨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가정이라는 작은 요람을 통해 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믿음의 자녀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던 사라를 통해서 언약의 자녀인 이삭이 길러졌다. 유대인이 되는 조건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라에 의해 신앙을 물려받은 이삭을 ‘The first Jewish baby, 최초의 유대인 자녀’라고 생각한다. 이삭은 사라가 그녀의 죽음 뒤에도 이 땅에 남긴 그녀의 유산이었다. 사라가 길러낸 이삭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려 했다. 자신을 묶어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려는 아버지에게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사라는 그녀의 장막에서, 하나님의 언약때문에 하나님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들을 길러낸 것이다.
사라는 이삭이 36살이었 때, 그녀의 나이 127세에 죽었다.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를 위해 매장지를 구입하고 지금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그녀를 묻는다. 그리고 사라가 없는 4년의 시간이 지난다. 그 후 아브라함은 종 엘리에셀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내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구해오게 한다. 아브라함의 종도 믿음이 좋았다. 그는 하란에 도착해서 기도한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이 끌고 간 열 필의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여인을 만나면, 그사람이 이삭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배우자임을 알겠다고 그는 기도한다. 그는 이삭의 어머니 사라처럼 나그네를 환대할 수 있는 여자를 배우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리브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종의 부탁에 자신의 물동이의 물을 주어 마시게 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창 24:19,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종은 이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그는 기도응답을 너무도 분명히 받았다. 열 필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것, 그것은 리브가에게 노동이 아니었다. 기쁨으로 기꺼이 섬기고자 했던 일이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임을 확신한 종은 리브가에게 청하여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온 이유와 자신이 지금 막 경험한 기도응답을 나눈다. 종의 이야기를 듣고 리브가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한다. 그래서 아버지 브두엘과 오빠 라반이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가겠나이다”라고 주저함없이 대답한다. 믿음의 사람은 이처럼 믿음의 확신이 서면 더이상 상황을 살피지 않는다. 가족들은 그런 리브가를 축복하며 말한다. 창 24:60,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리브가가 받은 축복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받은 축복과 같은 것이었다. 창 22:17,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자신의 자녀가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리브가도 사라와 같이 ‘어머니’가 되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언약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다.
하나님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언약의 세대를 일으키기 원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사라의 일생을 통해 가장 먼저 시작하셨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결국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지는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머니인 사라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창 24: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탈무드는 이삭의 ‘묵상’이 바로 기도라고 말한다. 저물 때 했기에 그것이 오후기도인 ‘민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삭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자라났음을 보게 된다. 그는 기도하던 중에 아내 리브가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창 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리브가를 맞이하면서 이삭은 새 장막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그녀를 맞아 들였다. 이처럼 같은 공간에서 세대에서 세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어진 것이다. 리브가 역시 이 장막에서 천만인의 어머니로, 원수의 성문을 취할 다음 세대를 길러낸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롬 8:19, 21,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세상의 피조물들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들, 언약의 세대들이 일어나길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과 공도를 행하는 언약의 세대들이 일어나 원수의 성문을 취하길 바라고 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유대인으로서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 나라로 온 열방에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을 일으키는 선교 사명에 실패했다.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열방에 전하는 선교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인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 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청년들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교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학에 다니는 청년들 중 7-80%가 입시공부하는 와중에도 저버리지 않았던 신앙을 대학 입학 후에는 저버린다고 한다. 입학하자마자 시작되는 취업 경쟁과 자극적인 세상 문화 속에서 수많은 자녀들이 그들의 신앙을 버린다는 것이다. 지난 7월 경기도 의회에서 성평등 조례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이 실행되면 동성애를 인정하는 성평등위원회를 모든 기업이나 교회를 포함한 공공기관에 설치해야 한다. 동성애가 보편적인 성행위로 인정되면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어머니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이 무너지는 것이다. 또한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는 공공의 적이 되고 그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동성애 조항을 입법화하면서 발생하는 역차별을 우리는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어머니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을 그 자궁에 품은 어머니, 그리고 자녀를 낳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는 어머니, 그리고 결국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어머니가 필요하다. 그 어머니는 사라처럼, 리브가처럼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원수의 성문을 취하는 언약의 세대들을 길러내는 자인 것이다. 그것이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 중요하다. 한국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로 살아가는게 참 힘든 것 같다. 자신의 경력이 단절되는 것을 힘들어 한다. 그저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것을 힘들어 한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있는 동안 우리는 유대인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지 배울 필요가 있다. 유대인 어머니들은 자녀의 근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긴 자녀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키우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 유대인의 격언에 “형제의 머리를 비교하면 양쪽을 다 죽이지만, 개성을 비교하면 양쪽을 다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 온 사람’이란 뜻이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혼자서 다른 편에 서다’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남들보다 뛰어나라고 요구하는 대신 남과 다른 사람이 되라고 자녀들에게 주문한다.
유대인 에디슨의 어릴 적 일화가 있다. 에디슨은 학교 선생님에게 2더하기 2가 왜 4인지 물었다고 한다. 태양은 왜 빛이 나는지, 비는 왜 어두울 때 내리는지 질문했다고 한다. 결국 수업에 적응 못하고 에디슨은 학습장애아로 판정받아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한다. 그 때 그의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결코 저능아가 아닙니다. 단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뿐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집에서 가르치겠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믿음이 옳았다. 그 믿음이 남과 다른 에디슨의 장점을 키워주어 훗날 위대한 발명가가 되게 한 것이다.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 시스템에 의해 우리 자녀들이 평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우리 자녀들은 완전한 자들이다. 각자의 부르심이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원수의 성문을 차지할 자들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도해야한다. 자녀를 기르는게 쉽지 않다. 육체적으로 많은 헌신이 필요하다. 우리 중에는 자녀 출산으로 인해 이미 경력 단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세대는 오직 어머니를 통해 이어진다.
우리 어머니는 7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셨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못나오셨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아무 경력없이 끝까지 나의 ‘어머니’셨다. 나는 이런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나에게 신앙이라는 거대한 유산을 물려주셨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어서도 신앙이 유산처럼 이어지는 우리의 일생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