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6 축복의 전달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1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6 축복의 전달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한국 청소년들은 고민이 생기면 누구와 이야기할까? 여성가족부 자료에 따르면 ‘친구와 상담한다’가 50.4%라고 한다. 그 다음이 엄마다. 29%다. 아빠와는 얼마 정도일까? 0.9%라고 한다. 자녀를 생각할 때 아빠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바쁜 아빠들이 아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축복의 말을 해주는 것이다. 부모에게 축복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은 건강한 자화상을 갖게 된다. 아이는 아빠가 비춰주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상을 형성해 간다. 아빠의 말을 내면화하고 그 말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아빠의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 속임수까지 사용했던 야곱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가 받아냈던 언약적 축복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주 우리는 이삭이 리브가를 맞이하는 장면을 살펴보았다. 40이라는 나이에 이삭은 결혼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결국 아내 리브가는 임신하게 된다. 그것도 일타쌍피, 하나가 아닌 쌍둥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태중의 아이들이 맨날 싸우는 것이었다. 창 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리브가는 괴로운 나머지 하나님께 질문한다.하나님이 답하신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는 결국 기도를 통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듣게 된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리브가는 아무래도 야곱에게 더 마음이 기울어진 것 같다. 야곱의 할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그가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이삭이 60세에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나이는 160세였다. 175세로 죽기까지 15년동안 아브라함은 손자들을 보며 살았다. 아브라함은 에서와 야곱 중 누구를 더 좋아했을까?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대인의 경전 희년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나온다. 희년서 19:16, “아브라함은 에서의 행동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이름과 후손을 야곱 안에 두어야 함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리브가를 불러 야곱에 관한 명령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에서보다도 야곱을 사랑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야곱이 5살 때 리브가와 야곱을 불러 말한다.희년서 19:17,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 딸아, 내 아들 야곱을 지켜보아라. 왜냐하면 인간 자손들가운데 복이 되기 위하여, 또한 셈의 모든 후손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나를 대신하여 땅 위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야곱도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모든 민족의 복이 된다는 말을 흘려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야곱은 에서가 사냥 후 피곤한 틈을 노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라고 그에게 제안한다.창 25:32-33,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여기서 에서가 판 ‘장자의 명분’은 무엇일까?장자의 명분은 히브리어로 ‘베코라(בכרה)’이다. ‘태를 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어미의 첫 태를 연 자가 가지는 특권을 말한다. 장자의 특권은 무엇인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의 권위를 이어 받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뒤를 잇는 장자에게는 또 하나의 특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창 17:6-8,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두 가지다. “자손을 많게 하겠다”와 “가나안 온 땅을 주겠다”는 것이다. 자손과 땅, 이 두 가지가 바로 언약적 축복인 것이다. 에서는 이 언약적 축복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그는 지금 당장 먹을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 언약적 축복을 이어갈 수 있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다.

장자의 축복을 뺏겨버린 에서는 후에 분노한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야곱이 떠나던 날 이삭은 야곱에게 당부한다. 아무하고나 결혼하지 말고 자신의 동족이 있는 밧단 아람으로 가서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다시한번 축복의 기도를 한다. 창 28:3-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기도에는 자손에 대한 축복과 땅에 대한 축복, 즉 언약적 축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축복대로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는다. 야곱 이후 이 언약적 축복은 열두 명의 아들 중 누구를 통해 이어졌을까? 야곱의 장남은 르우벤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첩 빌하와 통간함으로 장자권을 잃어버린다. 그 대신 장자권은 애굽에서 형제들을 먹여 살렸던 요셉에게로 돌아간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은 요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므낫세와 차남 에브라임이었다. 장자의 명분은 누가 이어갔을까? 차남인 에브라임이었다. 야곱은 임종 전에 손자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었는지 알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출애굽 이후 에브라임 지파는 다른 모든 지파를 이끄는 장자 역할을 한다.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였고, 성막도 에브라임 지파의 땅인 실로에 세워지게 된다. 실로는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된다.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실로에 올라와 여호와의 절기를 지켜야 했다. 그런데 이 실로의 시대는 300년 만에 막을 내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장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사기에서 우리는 장자의 책임을 다하기 보다는 장자지파로서의 권한만 행세하려는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그런 에브라임지파를 이렇게 평가한다.  78:9-11,“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장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의 시대는 이것으로 마감하게 된다.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며 실로는 ‘실로’ 무너져버리고만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언약적 축복을 이어갈 또 다른 장자가 필요했다. 누굴까? 바로 유다지파다. 시 78:67-69,“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어갈 자로 유다지파를 택하신다. 그리고 유다지파인 다윗을 통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제 예루살렘에 나타났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이 예루살렘 시대는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유다지파는 장자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예루살렘의 운명을 선포하신다. 렘 7:12-15,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실로에서 행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을 허물겠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그 일은 기원전 586년 이루어진다. 결국 예루살렘의 시대는 약 400년을 지속되다가 끝나게 된다. 하나님은 괴로우셨을 것이다. 당신이 택해 세운 장자들이 거듭 실패하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장자들의 실패로 하나님의 언약도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장자를 일으키셨다. 바로 당신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을 이어갈 장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이어갈 장자로 예수님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언약적 축복은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 이어지게 하셨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갈 3:14, 2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따라서아브라함의 언약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언약적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자들를 통해 이어지는 것이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적 축복의 본질은 존재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후손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계보는 그래서 중단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계보는 이제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빠로서, 엄마로서 자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뭘까? 그것은 이 언약적 축복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장자의 명분은 육신의 순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적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았던 사람들이 그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장자의 명분을 받았던 자들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장자의 촛대가 옮겨져 갔음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지금 내가 이 장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과거에 교회를 열심히 섬긴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장자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르우벤은 음욕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상실했다. 에서는 당장의 배고픔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없이 살 수 있다. 영적인 것에는 별관심 없이 세상의 물질과 먹고 사는 것에만 정신 팔려 살아갈 수 있다. 장자로 부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장자로 살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축복은 장자의 몫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자의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 장자의 책임을 다할 때 장자의 몫은 따라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장자가 된 것에 안주해선 안된다.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다음 세대와 열방에 전달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장자의 사명에 관심조차 없다면 언제 장자의 촛대가 옮겨지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 언약적 축복을 전달하는데 아버지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아버지는 축복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지적을 통해 자녀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대신 축복의 말을 심을 때 자녀는 그 축복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자녀들을 많이 축복해주기 바란다. 퇴근이 늦어져서 밤에 아이가 자고 있더라도 아이를 향해 축복하라. 아빠의 축복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아이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장자로서 그 명분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세대를 이어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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