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2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7 하늘의 기회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0-11)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평소 붓글씨를 즐겨 썼다고 한다. 그 중 ‘운둔근(運鈍根)’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고 한다. 옮길 운, 둔할 둔, 뿌리 근자다. ‘행운은 우둔하면서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온다’는 말이다. 일본의 심리학자 하하키기 호세이는 이 ‘운둔근’이 연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소개한다. 연구는 1, 2년 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몇 십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운(運)은 하늘이 내려주시는 기회를 말한다. 둔(鈍)은 우직함을 말한다.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와 정반대되는 마음가짐이다. 근(根)은 끈기를 말한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실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연구를 계속하려면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우직함과 끈기가 있어야 하늘이 내려주시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혼돈을 싫어한다. 불확실한 상황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서 빨리 답을 찾아 그러한 상황을 끝내기 원한다. 우리가 받았던 학교 교육의 대부분의 목표는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직장에서 요구하는 인재들도 문제의 원인을 빨리 파악하고 최대한 신속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매뉴얼에 익숙해진 뇌는 매뉴얼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고가 정지되어버린다. 그러면 초조해진다. 불안해진다. 빨리 그러한 상황을 종결하려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하키기 호세이는 그렇기에 더욱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극적 수용력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불안정한 상태를 견뎌내는 힘’이라고 한다. 성경의 인물 중 누가 가장 소극적 수용력이 많았을까? 나는 야곱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어떻게 인내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았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28:10-1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가고 있었다. 막막했을 것이다. 불안했을 것이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미래는 늘 불안한 것이다. 그의 인생은 이제 지는 해처럼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가 이르렀던 ‘한 곳’은 아무 이름도 없는 곳이다. 히브리어로 그저 마콤(מקום, a certain place)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지점에 자신의 인생이 처하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 좀 유식한 말로 이런 지점을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라고 한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두 상태의 중간에 위치한 애매모호한 상태를 말한다. 사전적인 뜻은 이렇다. ‘A liminal space is the time between the ‘what was’ and the ‘next.’ It is a place of transition, a season of waiting, and not knowing. Liminal space is where all transformation takes place, if we learn to wait and let it form us.’ ‘리미널 스페이스는 ‘이전’과 ‘다음’사이의 시간이다. ‘전환의 장소, 기다려야 하는 때,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장소이다. 그러나 리미널 스페이스는 모든 변혁이 일어나는 곳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을 배우고, 그것이 우리를 빚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적 체험은 바로 해가 지고 있던 한 곳,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일어나게 된다.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잠들었던 그 순간 하나님은 꿈에 야곱을 찾아오신다. 창 28:13-14,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땅과 자손’에 대한 언약이다. 야곱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 언약이 자신을 통해 이어질 것을 다시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야곱과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이 있는 백성의 삶에 동행하신다. 그들의 삶을 책임지신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불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명자는 그 사명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죽지 않는다. 잘못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는 삶이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반드시 따르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동안 야곱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꿈을 통해 그에게 영적인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창 28: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을 만난 그의 인생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그가 누웠던 곳은 이제 이름도 없는 ‘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된다. 이전에 그가 가졌던 불안과 두려움도 다 사라진다. 새로운 두려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그의 마음에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미래가 두렵지 않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도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라 불렸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엔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믿음이 있었었기 때문이다.
자,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에게 이제 탄탄대로가 열렸을까?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는 밧단아람에 이르러 첫사랑 라헬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해 야곱은 삼촌 라반 밑에서 7년을 일한다. 그래도 라헬을 사랑하기에 야곱은 칠년을 며칠처럼 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 라헬의 언니 레아와 첫날밤을 치르게 된다. 늘 속이고만 살았던 그가 이제 속임을 당한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또다시 칠년을 라반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그리하여 야곱이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데는 총 20년의 세월이 걸리게 된다. 창 31:41-42,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이 20년의 세월을 고난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가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야곱은 20년의 연단의 시간을 마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 형 에서를 만나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길에 빠진다. 그가 다다른 마하나임(מחנים)은 ‘두 진영(two camps)’이라는 뜻이다. 싸움과 대결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 마하나임은 야곱에게 또다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가 된다. 야곱은 두렵고 답답해진다. 그는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창 32:11-13,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는 거기서 철야기도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씨름을 한다. 야곱은 끈질겼다. 태중에서 형의 발목을 잡던 실력을 발휘했다. 천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천사가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맞선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결국 마하나임은 야곱에게 또 다른 변혁의 장소가 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פניאל)’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이곳에서 그는 더이상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다. 하나님과 이미 씨름을 끝낸 곳에서 다른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야곱은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한다. 그는 에서를 만나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원수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브니엘의 은혜인 것이다.
야곱은 에서와의 문제를 해결하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돌아온다. 여기서는 삶이 좀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딸 디나의 강간 사건을 겪게 된다. 또한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는다. 이어서 야곱은 그의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한다.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다른 자식들이 팔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없는 22년의 세월을 보낸다. 후에 야곱이 바로왕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시간들을 살아냈다. 그리하여 그는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세워진 것이다. 결국 야곱은 그가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모든 유대인들에게 유산처럼 남겼다. 야곱은 다른 어떤 족장들보다도 많은 시간 도피와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견뎌냈다. 그야말로 그는 모든 인생의 비극적인 순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인생의 비극을 겪을 때 야곱은 그들의 인생 모델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두번 경험했다. 그들은 바벨론과 로마의 침략으로 국가가 패망하는 것도 경험했다. 이 후로 여러 나라로 흩어져 추방과 박해를 경험했다. 중세 때는 ‘포그롬(pogrom)’이라는 대학살을 경험했다. 19세기 유럽에서 그들은 안티세미티즘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그야말로 유대인들은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이 그 모든 혼돈속에서 절망만했다면, 유대인은 역사속에서 사라진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지켜냈다. 그 말씀으로 다시 소망의 불을 지폈다. 탈무드를 기록하고 회당을 세워나갔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낸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국가로 부활했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야곱을 이렇게 평가한다. “To try, to fall, to fear, and yet to keep going: that is what it takes to be a leader. That was Jacob, the man who at the lowest ebbs of his life had his greatest visions of heaven.” (Sacks, Jonathan. Lessons in Leadership) 시도하고, 넘어지고, 두려워하나, 중단하지 않는 것, 그것이 리더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최악의 순간에서 하늘의 가장 큰 비전을 가진 사람, 그가 바로 야곱입니다.”
지금 우리 중엔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 혼돈의 시간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 매우 초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매뉴얼이 우리 손에 없다. 이러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해야 한다. 내가 해결해야겠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내가 멈춰서야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그제서야 내가 절망했던 그곳은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된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야곱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도 찾아오신다. 불안으로 가득한 여러분의 ‘마콤(place)’을 ‘벧엘’로 바꿔주시기 원하신다. 여러분이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여정이 되길 원하신다. 혼돈의 순간 우리는 그 혼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유대인들에게 ‘혼돈(발라간, בָּלָגָן)’은 그들에게 익숙한 삶의 한 형태다. 그러나 그들은 이 혼돈을 받아들임으로 창조적인 변혁을 이루어 내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볼 때, 우리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은 ‘발라간(무질서하다, 혼돈스럽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혼돈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돈스런 아이들을 용납해줄 때 결국 창조적인 변혁이 이 아이들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시점이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혼돈 속에서도 꾸준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대결의 장소, 마하나임은 무장해제 된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브니엘로 변한다. 끝까지 버티는 자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절망하고 있는 여러분의 삶에 하늘의 사다리가 내려지길 소망한다. 두려워 떨고 있는 여러분의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 빛이 비춰지게 되길 소원한다. 그리하여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찾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