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9 영원과 이어지는 삶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2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9_ 영원과 이어지는 삶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 38:27-30)

헬라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개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흘러가는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기회의 시간, 영원과 이어지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를 보면, 앞머리는 많은데 뒷머리는 대머리다.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한편 그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뭘까?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그를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뭘까?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저울을 들고 있는 이유는 뭘까? 기회가 앞에 있을 때 저울을 꺼내 정확히 판단하라는 의미다.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뭘까? 칼같이 결단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카이로스의 또 다른 이름은 ‘기회(Opportunity)’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기에 현대인에게 하루 24시간은 늘 모자란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효율적인 삶을 너도나도 추구한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기회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영원과 이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한다. 그들이 어떻게 기회의 시간을 잡았고, 그것이 어떻게 영원한 시간과 이어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역시 영원과 이어지는 삶을 사는 기회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창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산다. 그의 인생곡선은 실제로 내려가고 있었다. 유다가 형제들을 떠난 이유가 뭘까? 우리는 그 이유가 요셉 사건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요셉을 시기했던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려 했다. 그러나 그 때 맏아들 르우벤은 생각이 달랐다. 요셉을 구해내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을 죽이지 않은 채 구덩이에 던져 놓자고 제안한다. 그는 나중에 요셉을 구출할 생각이었다. 르우벤이 없는 사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 때 동생 요셉을 살리고 싶었던 유다가 제안한다. “동생을 죽여서 뭐하겠느냐, 그냥 팔아 넘기자.” 형제들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그래서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 간다. 후에 르우벤이 돌아와 보니 요셉이 사라진 뒤였다. 르우벤은 옷을 찢으며 슬퍼한다. 맏형의 분노 앞에 다른 형제들은 변명했을 것이다. “형, 우리는 그냥 유다의 제안을 따랐을 뿐이야”라고 말이다. 이 후 요셉을 팔아버린 책임을 유다가 다 뒤집어 쓰게 된 것 같다. 거기에다 유다는 요셉을 잃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깊은 자책감에 빠졌을 것이다.

창 38: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유다의 인생이 좀 삐뚤어졌던 것 같다. 그는 동족이 아니라 가나안 이방 여인을 데리고 산다. 이름도 없는 그녀를 통해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아들을 얻게 된다. 이 후 유다는 다말을 장자 엘의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그런데 엘은 여호와 앞에 악하므로 자식 없이 죽게 된다. 이 때 유다는 둘째인 오난에게 다말의 고엘이 되어 주라고 말한다. 고엘은 ‘구속자(redeemer)’라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가 아들 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 토지도 상속받지 못하고 생활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 형제가 고엘이 되어 형수를 통해 상속자를 낳아주는 것이 의무였다. 그러나 형의 씨가 생기면 오난은 장자의 몫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고엘의 의무를 거부한다. 이러한 오난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기에 그도 죽게 된다. 자, 두 아들이 죽었다. 유다는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에 가 있으라고 지시한다. 막내 셀라가 커서 고엘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유다는 막내 셀라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도 죽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유다의 아내는 죽고, 그는 홀아비가 되었다. 막내 아들 셀라는 장성했지만 유다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막내 셀라를 다말에게 주겠다는 약속은 물 건너간 것이었다. 다말은 초조했다. 그녀는 자신의 대(代)가 그대로 끝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히타이트법에 의하면 과부가 남편의 마지막 형제와 결혼했는데, 그도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다말에게 남은 마지막 고엘은 바로 시아버지 유다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시대의 윤리와는 맞지 않지만, 그의 씨를 받아내는 것이 다말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였다. 이것을 위해 다말은 담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유다에게 변장하여 접근한 것이다. 며느리인줄 몰랐던 유다는 다말에게 염소새끼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동침한다. 다말은 염소새끼를 받기까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아 놓는다. 삼개월 후 다말은 임신한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혼자 사는 과부가 임신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간음이었고,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하는게 당시 법이었다.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지시한다. 창 38: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다말은 지혜로웠다. 시아버지의 죄를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말의 대사는 오직 유다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유다의 인생극장에서 유다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다말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다말을 처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행위는 묻히게 되고, 자신은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다. 그런데 유다는 이 두번째의 선택을 한다. 창 35: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인 유다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유대인 작가 요람 하조니는 유다를 이렇게 평가한다. “유다는 개인적 약점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쳐 도덕적 원리를 재확립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이어서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특질은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유다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숨기기 위해 다말을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의를 위해 공개적 수모를 택한 것이다. 이것은 유다의 인생에 있어서 카이로스의 순간이 된다. 그것은 그의 선택으로 다말이 죽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베레스였다. 베레스가 누구인가? 룻 4:18-22,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베레스는 바로 보아스의 조상이자, 다윗의 조상이었던 것이다.

이후 유다는 또 한번의 카이로스의 순간을 맞이한다.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모든 형제들이 끌려갔을 때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오게 하기 위해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 그를 종으로 잡아두려한다. 그때 유다가 나서서 말한다. 창 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베냐민까지 종으로 팔린다면 아버지 야곱이 겪을 고통을 그는 걱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다는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기로 자처한 것이다. 형제들의 구속자로, 그는 고엘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후에 유다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는다. 창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 말씀대로 훗날 유다 지파의 자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리하여 온 백성의 칭송받으며, 백성들이 그 앞에 절하게 된다. 유다의 축복은 또 이어진다.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표현에서 ‘실로’는 ‘메시아를 의미한다. ‘그 메시아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는 유다지파를 통해 오게 된다. 그렇다면 이 메시아는 과연 누구일까?

유대인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를 이렇게 밝힌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바로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사건은 메시아의 기원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말의 목숨을 건 결단이 없었다면, 메시아는 유다 자손을 통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거나, 형제들의 구속자로 자처하지 않았다면, 메시아는 유다 자손을 통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훗날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의 고엘로 자처하지 않았다면, 메시아는 유다 자손을 통해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우리의 고엘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1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유대 땅에는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당시 헤롯왕도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마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토라를 연구하던 사람들의 결론은 어디였을까? 베들레헴이었다. 마 2:5-6,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 말씀은 미가서에 있는 예언의 말씀이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히브리어로 ‘모짜오타브 미케뎀 미예메이 올람(עולם מימי מקדם מוצאתיו)’이다. ‘모짜아(מוצאה)’는 ‘기원’이란 뜻이다. ‘케뎀(קדם)’은 ‘창조 이전의 시간’을 말한다. ‘예메이 올람(ימי עולם)’은 ‘영원한 날들, 세상 시작의 날들’이란 뜻이다. 메시아는 창조 이전의 시간부터 존재했고 영원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메시아는 지금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을 구원해줄 역사적 인물이 아닌 것이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게된 존재가 바로 메시아인 것이다. 그게 누구인가? 예수님밖에 없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다른 형태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는 것이다.

요 1:10-12,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날을 우리는 오늘 크리스마스로 기념하고 즐거워한다. 메시아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영광을 즐거워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의 고엘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삶을 우리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고엘이 되셨다. 예수님은 짧은 33년의 생애를 사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며 숨을 거두실 수 있었다.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셨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바쁘고 분주한 시간을 살아간다. 연말이 되면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계획으로 마음이 분주해진다. 크로노스의 시간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분주해지고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정말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수 있을까? 태초에 영원부터 계셨던 하나님이 나의 고엘이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때부터 영원과 이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게 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기꺼이 고엘이 될 때, 우리는 그 때부터 영원과 이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직장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이라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 성탄절이 하나님의 영원과 이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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