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19년 12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0 므낫세의 시간 에브라임의 시간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창 41:51-52)
2019년 한 해도 저물고 있다. 한 해의 시간을 돌아보는 때다. 오늘 토라포션은 히브리어로 ‘미케츠(מקץ)”’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미케츠 쉬나타임 야밈(ימים שנתים מקץ)”은 “2년의 시간 끝에”라는 뜻이다. 요셉은 2년 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다. 서른 살이 되던 그 해 요셉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준다. 그리고 애굽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된다. 드라마같은 반전이 그의 삶에 일어났다. 어려운 한 해를 보낼수록 우리는 드라마 같은 반전이 새해에 일어나길 바란다. 오늘 요셉의 삶에 있었던 반전을 살펴보며 우리의 삶에도 반전을 준비하는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창 41: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총리가 된 요셉은 온의 제사장의 딸 아스낫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아들을 얻게 된다. 첫 아들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17살 한창 때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다.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다. 그것을 거절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 왕의 술관원을 만나 그의 꿈을 해석해주었고, 그가 복직될 것이라고 말해준다. 술관원은 요셉의 해석대로 복직되었지만 그는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고 만다. 요셉은 감옥에서 잊혀진 자가 되었다. 요셉은 결혼하여 가족을 이룰 것이라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결혼하여 첫아들을 얻게 된 것이다.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는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מנשה)’라고 짓는다. 히브리어로 ‘나싸(נשה)’는 ‘잊어버리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는 뜻으로 요셉은 첫아들의 이름을 지었다.므낫세를 얻기까지 요셉에게는 긴 상처의 시간들이 있었다. 13년 동안 요셉에게는 치유되지 않은 깊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므낫세의 시간’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 고난의 시간을 잊을 수 있었을까?
그가 스스로 잊을 수 있었던게 아니다.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하신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이 치유해주셔야 치유되는 것이다. 요셉은 그를 어렵게 했던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요셉이 어떻게 대이집트제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기 때문이다. 거기서 바로왕의 술관원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직된 술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혀진 자 요셉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기억된 자가 된다. 바로가 자신이 꾼 꿈 때문에 번민하며 그 꿈을 해석해 줄 자를 찾을 때, 바로의 술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낸 것이다. 창 41: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그의 기억력이 2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 바람에 요셉은 바로왕 앞에 바로 불려가게 된다. 요셉은 그의 꿈을 해석해주고 애굽의 총리가 된다. 만약 그 전에 기억되어 요셉이 풀려났다면 바로와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잊혀졌던 요셉은 가장 적절할 때 기억된 것이다. 사람을 용서하는게 쉽지 않다. 자신을 팔아버린 자, 자신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자,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은 자, 모두가 원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요셉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을 용서하고 고난의 시절을 잊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창 41: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אפרים)’이라고 짓는다. ‘에프랏(אפרת)’은 ‘열매를 많이 맺음’이란 뜻이다. 에프라임(אפרים)은 히브리어 쌍수로 ‘두 배의 결실’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요셉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요셉이 번성한 것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가 고난을 겪었던 땅에서였다. 고난의 땅 애굽에서 요셉은 바로왕 앞에 서게 된다.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요셉은 꿈의 전문가였다. 그는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고 7년의 풍년과 그 이후에 있을 7년의 흉년을 대비해 5분의 1의 곡물을 세금으로 비축하라는 제안을 한다. 꿈해석으로 고민이 풀리자 바로는 요셉에게 감동한다. 창 41:38-3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리하여 바로는 요셉을 총리로 세워 애굽 전국을 다스리게 한다. 너무도 엄청난 반전이다. 애굽의 노예가, 감옥의 죄수가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다. 창 41:46-47, 49,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풍성한 ‘에브라임의 형통’을 누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성공에 주목한다. 그의 형통했던 ‘에브라임의 시간’에 주목한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형통은 고난의 시간이었던 ‘므낫세의 시간’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사실 ‘므낫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에브라임의 형통’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므낫세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요셉의 경우를 살펴보자.
요셉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아들이었다. 채색옷을 입고 살던 17세 청년 요셉에게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던 시간, 감옥에서 죄수로 살아야 했던 시간은 너무도 가혹했다. 그것은 부당하게 그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를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의 손에 맡긴다. 감옥에 갇혀서도 마찬가지였다. 창 39:20-22,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 역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에게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다 맡긴다. 여기서도 요셉은 총무 역할을 한 것이다. 노예로, 죄수로 요셉은 충분히 원망으로 보낼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기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에게 상황과 환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성실하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이것은 후에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국가의 일을 지혜롭게 감당할 수 있었던 모판이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삶에게도 부당하게 주어지는 시간들이 있다. 새로 임명된 상사나, 새로 발령된 임지에서 낯설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간을 감수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더 큰 목적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주재원으로, 유학생으로 이스라엘에서의 시간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낯설고 힘든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므낫세의 시간이며, 연단의 시간이다. 이 기간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환경과 사람들은 사실 나를 에브라임의 축복의 시간으로 인도하는 훈련 교관들인 셈이다. 요셉의 형제들과 보디발의 아내, 술관원장…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요셉을 훈련시키셨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훈련된 요셉을 바로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요셉에게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 그의 지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경외했기에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갈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이 그가 지켰던 원칙이었다. 지혜는 그가 노력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요셉은 결국 당대 제국의 바로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요셉에게 감옥은 그의 운명이 뒤바뀐 곳이다. 요셉은 2년 연장된 감옥생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들을 섬기길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감옥처럼 여길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는 커녕, 빨리 이 인생의 감옥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하고 살 수 있다. 그러나 고통스런 그 자리가 나의 운명이 바뀌는 모판이 될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리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과 사람 섬기는 손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그랬을 때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말한다. “Miketz is the space we make in our minds for the things not under our control. The name of that space is faith. (Sacks, Jonathan. Genesis: The Book of Beginnings) “미케츠(at the end of, ~끝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마음 속에 만드는 공간이다. 그 공간의 이름은 믿음이다.” ‘잊고 싶은 시간’과 ‘형통의 시간’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므낫세의 시간’과 ‘에브라임의 시간’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우리는 그 간격을 믿음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가 하실 일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할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힘든 상황을 탓하거나, 나를 부당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해야 한다. 한 해 동안 내가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힘들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도 용서해야 한다. 내 모든 고난의 일을 잊어버리는 ‘므낫세의 은혜’가 있어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는 ‘에브라임의 은혜’가 열리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 두 가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열리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