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2 섭리를 따르는 삶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월 1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2 섭리를 따르는 삶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창 48:15-16)

하나님이 이끄시는 우리의 삶에는 ‘우연’이 없다. 믿음의 사람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는 사람이다. ‘섭리’가 뭘까? 세상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토저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고의 길을 허락하신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이 믿음을 놓치지 말라. 보이는 삶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라!”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 그것은 믿음의 조상들의 삶에서 요구되었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오늘 토라포션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봐예히(ויחי)’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가 살았다”라는 뜻이다. 야곱은 인생의 마직막 17년을 애굽에서 살았다. 그의 147년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창 48: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야곱에게 임종의 순간이 다가왔다. 요셉은 급히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을 방문한다. 야곱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말한다. 창 48:3-4,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겠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원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언약을 야곱에게도 주셨고, 그를 통해 그 언약을 이어가게 하셨다.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이 말을 왜 요셉에게 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이 하나님의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고, 다음 세대를 통해 계속 이어져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키려 한다. 창 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야곱은 왜 요셉의 두 아들을 굳이 자신의 아들로 삼으려 했을까? 할아버지가 아들 욕심을 내는 걸까? 야곱의 삶은 하나님의언약을 따라 이루어진 삶이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그 언약이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 중 요셉의 아들 둘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직접 유산을 상속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마음을 행동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창 48: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무릎 위에 앉히는 것은 그 당시 법으로 양자를 삼는 의식이라고 한다.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는 의식을 마친 뒤, 야곱은 이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부른다. 창 48:15-16,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그는 먼저 조상의 하나님을 불렀다. 믿음의 부모, 하나님을 섬기는 부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브라함의 사명은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창 18:19)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사명대로 자녀들을 양육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언약이 이삭과 야곱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믿음의 부모가 기도했고, 그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쳤기에, 자녀들이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창세기의 결론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고, 족장들은 믿음의 가정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라를 세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믿음의 가정을 세워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라고 말한다.

야곱은 또한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부모님의 신앙을 물려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기르셨다”는 히브리 동사 ‘라아(רעה)’로 표현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나를 목자로서 돌보셨다는 뜻이다.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주신 하나님은 그가 21년 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를 목자처럼 지켜보시고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던 것이다.

야곱은 이어서 하나님을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라고 부르고 있다. 야곱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경험했다. 얍복강에서 그는 자신을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자신에게 새 이름을 주시며 그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야곱에게 일어났던 모든 위기는 결국 그를 언약의 전달자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는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한다.

창 48:16,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번식하다’는 히브리어로 “다가(דגה)”라는 동사가 씌었다. 물고기가 ‘알을 낳다’는 뜻으로 ‘수가 많아지다’는 뜻이다. 이 축복대로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을 대신하는 두 지파로 형성된다.

자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야곱이 축복할 때 그의 오른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이다. 오른손은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요셉은 당연히 장자 므낫세에게 오른손이 얹혀질 줄 알았다. 놀란 그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들어 다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야곱은 이렇게 반응한다.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실수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던 것이다. 야곱은 자연적인 출생의 질서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더 높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이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종종 세상의 방식과 순서를 깨뜨리신다. 약한 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세상의 질서와 상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것이 깨뜨려질 때 혼돈스러워한다.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했던 축복이 내 앞에서 교차되어 다른 사람에게 갈 때 혼돈스러워한다. 내가 원했던 축복이 오지는 않고 어려운 일만 벌어질 때, 우리는 괴로워 한다. 그리고 그 고난을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로 단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이 저주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했던 자들은 아브라함이고, 야곱이고, 요셉이고, 예수님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사 27:9,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이 말은 환난을 통해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고 정결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난이 가혹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창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결국 야곱은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한다. 히브리서는 이 일을 야곱이 믿음으로 행한 일로 기록한다.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했고, 죽을 때조차 그 섭리를 따르기를 힘썼던 것이다. 이 야곱의 축복대로 에브라임은 출애굽 이후 장자지파가 된다. 여호수아가 이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 땅인 실로에 세워진다. 그리하여 에브라임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야곱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예비하는 삶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흔드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에 있었던 상실이다. 과거 내가 실수했던 것과 실망했던 것이 기억나서 괴로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염려다. 장차 내가 또 실망할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틀어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섭리일 수 있다. 그러나 섭리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과 복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고 산다면, 우리는 변화가 난무하고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시 4:8편은 말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런 시편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임한다.이때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혼란과 의심으로 반응하거나 또는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취하지 못한 경우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에 혼란으로 반응할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작은 혼란이라도 그것으로 인해 당신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당신이 성경의 교훈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혹독하게 나의 삶에 임할 때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다. 이것을 대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심령에 차곡차곡 쌓아놓아야 한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셉이나, 야곱이나 욥의 삶에 일어났던 혹독한 고난의 시간들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난은 결국에 복을 주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시간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거대한 일부분을 살다 간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움이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를 지나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섭리를 마침내 이루어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잘 나가는 삶을 사는게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며 그 방향에 맞게 삶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세상의 방식과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어 보이고, 힘든 삶을 자초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되는 것이다.

시 33:11-12,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헛된 일을 꾸며도, 오직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계획이 서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여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축복함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대대로 이뤄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