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3 미래를 살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오늘부터 출애굽기를 살펴본다. 오늘 토라포션의 제목은 “쉐모트(שמות)”다. “이름들”이란 뜻이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으로 출애굽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오늘 토라포션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소개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전체 출애굽기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우리 인생은 무언가에 잡혀있다. 자유를 갈망하나, 우리 안과 밖에 있는 애굽의 세력이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가실 미래를 살기 보다는 과거에 머물러 살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출애굽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은 우리 인생의 출애굽을 위해서 중요한 일이다. 오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살펴보며 내 인생에 출애굽을 행하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새롭게 아는 은혜가 있길 소망한다.
출 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אלהים)’이다. ‘엘(אל)’의 복수형이다. ‘엘(אל)’ 자체가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엘’의 의미는 ‘to be in front of’다. “앞에 있는 분, 먼저 존재하는 분”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앞에 계시는 분이다. 나의 계획, 나의 가정, 나의 상황, 나의 문제 앞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엘로힘’이란 단어가 네번 나온다. “하나님이 들으셨다(אלהים ישמע). 하나님이 기억하셨다(אלהים יזכר). 하나님이 보셨다(אלהים ירא). 하나님이 아셨다(אלהים ידע).” 이는 매우 이례적인 표현이다. 보통 주어는 한번만 나와도 된다. 그리고 주어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는 접속사로 연결해서 표현하면 된다. 그런데 ‘엘로힘’이란 주어를 매번 다 쓴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 앞에 존재하시는 분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먼저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듣고, 기억하고, 보고,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탄식하고 있는 어려움도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고,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생에 고통받는 지점을 아시고, 거기서 출애굽해야 할 필요를 먼저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생의 희망은 이처럼 우리를 먼저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그를 만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출 3:6)고 소개하신다. 하나님은 막연한 개념 속에 계셨던 분이 아니었다. 모세의 조상들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그들의 인생에 깊숙히 관여했던 하나님이었다. 그런 하나님이 지금 모세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יהוה)’로 나온다.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발음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이름’이란 뜻인 ‘하쉠(השם)’으로 읽는다.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여호와’는 인간 역사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역사 속에 찾아오신 가장 결정적인 하나님의 사건이 무엇인가? 십자가다.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각각 고유의 뜻이 있다. ‘여호와(יהוה)’라는 단어에서 요드(י )는 손(יָד)을 뜻한다. 헤(ה)는 ‘보라(behold)’라는 뜻이 있다. 바브(ו)는 ‘못’을 뜻한다. 헤(ה)는 또다시 ‘보라(behold)’라는 뜻이다. 이것을 연결하면 “손을 보라, 못을 보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연상할 수 있다. ‘여호와’는 결국 죄에 고통받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손에 못박히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이름인 것이다.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시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출 3:8, “내가 내려가서(ארד)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להצילו)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להעלתו)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희를 건져내고 인도하기 위해 내려가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경배나 받으시며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다. 불의를 바로 잡고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내기 위해 인간 역사 속으로 내려오시는 분이다.
출 3:9,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은 인간 구원의 역사를 홀로 진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출애굽의 역사를 진행하기 원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길 원하신다. 나와 여러분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의 반응은 ‘내가 누구이기에’이다. 자신이 적격자가 아니라는 생각이다.느닷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놀란 것 같다. 사실 모세는 애굽에서 실패를 경험한 인생이었다. 히브리 동족을 위해 행동하다가 애굽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나온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애굽에 가서 히브리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것은 감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모세의 거절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소명의 성취는 소명받은 자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어서 출애굽의 목적을 말씀해주신다. 그것은 이 산, 즉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출애굽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정치적인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언약공동체로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는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막막했다. 동족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에흐예 아쉘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한국어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지 않는 번역이다.
‘에흐예 아쉘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는 헬라어로 ‘ego eimi ho on’으로 번역된다. ‘스스로 있는 자’, ‘존재의 근원’을 뜻한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하면 하나님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미래시제로 번역한다.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미래 시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는 앞으로 내가 하게 될 행동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동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행하실 때,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받는 역사의 현장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처럼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관념 속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다. 고통받는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현실을 바로 잡으시는 분이시다. 제국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것을 흔들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은 늘 미래에 행동하실 하나님을 바라봤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은 이미 주어진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삭과 야곱과 모세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은 늘 저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믿음의 조상들은 항상 그들의 믿음을 미래에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께 두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속에서 행동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유대 민족만큼 많은 고난을 경험한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들을 전멸하겠다고 덤벼든 시도들도 많았다.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로마제국이 그랬다. 하만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고, 오늘날 이란이 그렇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꺾기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행동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렘 31:35-36, “낮에는 해를 주셔서 빛을 밝혀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들이 빛을 밝히도록 정하여 놓으시고,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가 소리 치게 하시는 분, 그 이름은 만군의 주이시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정해진 질서가 내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언제까지나 한 민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던 제국은 사라졌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만큼 많은 위기와 위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나라가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며, 어떠한 역경속에서도 그들을 위해 행동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위해 행동하실 미래시제의 하나님이심을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열어가실 미래를 살아가기 원하신다. 우리가 오늘 경험하는 어려움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애굽으로 돌아가길 바래서는 안 될 것이다.과거 애굽에서 먹었던 부추와 마늘을 동경하며 향수에 젖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과거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의 미래를 열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 이제 2020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올해 여러분이 있는 직장과 가정, 학교에서 출애굽의 역사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경험 때문에 모세처럼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는가?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진 않은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미래에 행동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길 바란다.
출애굽기를 통해 우리가 알게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 앞에 먼저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하신 이름은 ‘에흐예 아쉘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이다. 우리가 부딛히는 고통의 현장에 오셔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기대하고, 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과거 익숙한 자리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이 이끌어 내실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게 되길 바란다. 우리의 미래를 여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