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가정별로 혹은 개인의 처소에서 아래의 가이드를 활용하여 예배하면 좋겠습니다.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2월 29일 샤밧예배 가이드
샤밧 오전 11시에 각 가정 또는 각 처소에서 아래의 내용으로 예배드립니다.
1. 사도신경을 낭송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2. 찬양을 부릅니다: 오직 주만이
3. 설교를 읽습니다.
아둘람의 노래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1-2)
실패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성공을 바라며 우리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을 것이다. 뭐 이정도면 성공했다고, 잘 살았다고 주변에서 우리를 칭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마음의 한 켠에서 ‘너는 실패했다’는 음성이 들려온다면 그것처럼 당황스런 순간은 없을 것이다.
아둘람 굴로 도망했던 다윗은 실패자였다. 실패는 환영하지 않아도 우리 삶에 쳐들어 올 때가 있다. 아둘람은 다윗의 삶에 찾아온 너무도 명백한 실패의 현장이었다. 그가 이 실패를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 삶에 찾아온 실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블레셋의 도시 가드로 도망간다. 거기서 가드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를 경계하자 다윗은 왕 앞에서 미친 척연기를 한다. 연기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미쳤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그리고나서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아둘람이었다.
아둘람 굴 속에 누워 있는 다윗의 신세를 생각해 보라. ‘내 인생 이대로 끝나는 걸까?’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리앗을 죽인 전쟁영웅이었다. 여인들은 그를 환호하며 노래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가 거둔 승리로 인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사울왕에게 쫓기는 신세로 아둘람 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 지 기약도 없이 그의 인생은 아둘람 굴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가 굴에 있을 때 지은 시가 있다. 아마도 아둘람 굴이 아닐까 한다. 시 142:1,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곧 기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아둘람 굴은 그가 원통함을 토해 놓는 곳이 된다. 2-4절,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피난처로 알고 아둘람 굴에 들어왔지만, 이곳이 언제까지 자신의 피난처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기도하면서 진정한 피난처를 발견한다. 5-6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삶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곳에서 다윗은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인생이 닫힌 곳에서 다윗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열어 보인다. 아둘람은 이처럼 다윗이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더 깊은 의존을 배운 곳이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는 인생을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갔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왕의 직분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탄식과 호소를 마친 다윗은 이렇게 선포한다. 7절,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이 예언적인 선포가 이루어진 것일까? 다윗에게 사람들이 몰려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윗을 찾아 온 자들은 별로 의인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윗의 상황을 역전 시켜줄 만한 위인들이 오지 않았다.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 모두 사울을 피해서 다윗에게로 온 힘없는 약자들이었다. 400명의 사회적 추방자들.. 다윗은 과연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들은 후에 다윗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 실제 주역들이 된다. 자신을 받아 준 다윗을 위해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용사들이 된 것이다.
다윗이 굴에서 쓴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시편 57편이다. 1-2절,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7-8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인생이 갇힌 굴속에서 어떻게 이런 선포가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그곳은 다윗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확정한 곳이 된다. 다윗은 가장 힘든 시기에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을 노래했다. 그러면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선포했다. 새벽은 가장 어두운 밤을 뚫고 빛이 오는 시간이다. 다윗은 피난처되신 하나님을 통해 역사의 여명이 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처럼 아둘람은 다윗에게 새로운 시대를 여는 비전이 잉태된 곳이다. 그리고 이 비전은 다윗을 찾아온 400명에게 고스란이 전수되어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 준다. 그리고 이 400명의 사람들은 후에 다윗 왕조를 세우며 날아 오르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가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원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철저히 자신을 내려 놓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권위자를 그 위에 두셨다. 만약 사울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철저히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지나면서, 다윗은 사람의 인기에 주목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자가 되어 갔다.
다윗은 이후 엔게디 광야로 피한다. 그는 거기서 동굴로 들어온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의 측근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사울을 제거하라고 다윗을 재촉했다. 자, 자신의 고난을 당장 끝낼 수 있는 순간이 다윗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여전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여겼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다. 사울을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도망자로 피해 다니는 시간이 연장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흔히 내 인생이 동굴에 갇혀 버린 것 같을 때, 우리는 그 원인 제공자들을 헤아린다. 그리고 그 인간들을 향해 원망하며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그 동굴이 복수의 칼을 가는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 혹 그러한 동굴에 갇혀 있다면 그곳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향해 노래 부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철저히 주님께 피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사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탁월한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권위에도 철저한 순종의 훈련을 묵묵히 감당했던 것이다. 단순히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꽉 막힌 동굴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그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십 여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단지 허비되고 낭비되는 시간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 십여년의 시간은 다윗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빚어지는데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캄캄한 동굴의 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자녀의 문제로, 나랑 통하지 않는 배우자를 통해서, 직장과 현실에서 부딪히는 여러 관계나 진로의 문제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슬프고 불안한 밤을 맞이하게 된다. 허둥지둥 쫓겨 도망했던 다윗처럼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고 나서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을 유일한 나의 피난처로 노래할 수 있는 아둘람이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시간에 순종하며 철저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하는 엔게디의 광야가 된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내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그 시기에 내가 하나님 한 분만 주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가장 값진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여겨지는 시간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인생에 절망스런 아둘람의 시간이 찾아올 때,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선포하면서, 그 캄캄한 동굴에서도 새벽의 여명을 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4. 설교 후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1) 나의 삶에서 가장 캄캄했던 아둘람은 언제였습니까?
2) 다윗에게 아둘람 동굴은 어떠한 곳이었습니까?
3) 아둘람에서 빚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4) 나에게 아둘람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5. 서로를 위해 (혹은 각자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6. 중보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 한국인/중국인 입국이 금지되었고, 한국/중국 사람에 대한 공포 감정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련부서와 언론에서 정확한 상황분석을 하게 하시고, 필요 이상의 거부감정이 확산되지 않게 하소서. 또한 한국/중국 내에서 보다 근본적인 대책과 치료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로 직장과 학교, 일상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호해주시고, 두려움과 원망이 아니라 신뢰와 담대함으로 이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게 하소서!
7.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