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3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19 공동체 회복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출 35:1)
지금 우리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나라보다 모이기를 힘썼던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가진 한국교회로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교회의 생명은 모이는 데 있다. 모여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모이기를 힘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이지 않는 것이 이웃에게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이 되는 시기이다. 네타냐후 총리도 “지금은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지금 열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했기에 우리도 당분간은 모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이지 않고 어떻게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히브리어로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가 세가지 있다. 에다, 찌부르, 케힐라이다. 첫번째 ‘에다(עדה)’라는 단어는 성경에서는 ‘회중’이라고 표현된다. 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ישראל בני עדת כל)’이란 표현에서 ‘에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회중’이란 단어는 출애굽기 12장 3절에서 처음 등장한다. 출 12: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공동체를 ‘에다’라고 불렀다. ‘에다’는 ‘에드’(עד)에서 온 말이다. Witness, 즉 ‘증거, 증인’이란 뜻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부터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순히 바로의 강제노역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섬기고 증거하는 예배공동체를 만드는데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회중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따라서 ‘에다’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아주 강한 집단 정체성을 갖게 된다.
두번째 ‘찌부르(צבור)’라는 단어는 ‘군중’이란 말로 표현된다. ‘찌부르’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아니다. 숫자로 집계되는 군중을 의미한다. 통곡에 벽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알지 못한다. 그저 기도하기 위해 잠시 같은 시간, 같은 곳에 모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 ‘찌부르’이다. 유튜브 생방송에 접속한 사람들도 그런 의미에서 ‘찌부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접속하지만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한다. 단지 접속자 수로 파악될 뿐이다.
세번째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로 ‘케힐라(קהלה)’가 있다. ‘불러 모으다‘라는 뜻의 ‘카할(קהל)’이란 동사에서 온 단어다. 따라서 ‘케힐라’는 ‘부름받아 모인 공동체’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교회를 ‘케힐라’라고 부른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출 35: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그들을 부름받아 모인 공동체, 즉 ‘케힐라’로 만드는 것이었다.모세가 그들을 모은 이유는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즉 ‘에다’ 공동체가 집단 패닉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불안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불안의 자리를 금송아지로 대체해버린다. 그들은 그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며 방자히 행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에다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우상을 섬기는 군중으로 전락해버린다.
코로나 19로 인한 불안과 공포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외지만 많은 나라에서 사재기가 일어나고 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공동체는 사라지고, 서로 살고보려는 생존욕구만 지배하게 됨을 볼 수 있다.
모세는 불안과 혼돈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을 섬기고 증거하는 공동체로 세워야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두가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첫번째 명령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명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왜 이 두 가지 명령이 필요했을까? 안식일과 성막은 이스라엘을 신앙공동체로 세우는데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위해 제정해 놓으신 시간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시간이다. 개인의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근성이 가득한 군중이었다. 쉽게 불안해 하고,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막을 건설하며 공동체로 세워진다. 이들은 성막을 건설하는 일에 자원함으로 참여한다. 성막에 필요한 여러가지 헌물들을 가져오고, 또 자신들이 가진 기술로 각기 성막을 짓는데 참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고 성막을 지으면서 급격히 신앙공동체로 세워진다. 그들은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로 모인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나타내셨다. 그들은 신앙공동체로 세워지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이웃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나누는 에다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열심히 주일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렇게 모여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했기에 성도들은 세상에 나아가 사랑과 용서와 선행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에다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믿는 자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세상은 더 개인주의로 각박해졌을 것이다. 서로를 용서하지 않아 더욱 불화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교회가 욕먹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성도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맛나는 곳이 되는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 19로 집단적인 패닉에 빠져있다. 공동체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부터 살고보려는 생존 욕구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교회는 모일 수 없어 SNS와 온라인으로만 연결되어 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군중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때 모세에게 주셨던 두가지 하나님의 명령에 반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증거하는 자로 부름받은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에다 공동체로 하나님이 정하신 안식일을 지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당분간 모여서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이 안식일을 통해 우리의 일과 우리의 관심사를 멈추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의 관심사를 붙잡아야 한다. 이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어려워진 사람들에게 작은 것들을 나누는 움직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또한 우리는 지금 함께 예배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삶의 공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를 마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을 세우는 것은 단순히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받은 그 정체성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온라인으로 접속하는 그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우리가 어떻게 부름받은 공동체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교회 건물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인 가정과 직장과 사회 구석구석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새롭게 건설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바라기는 코로나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일어나는 공동체, 케힐라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