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4 혐오 팬데믹 시대의 그리스도인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4월 2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4 혐오 팬데믹 시대의 그리스도인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레 13:45-46)

인트로 영상: 초등생들의 혐오놀이

코로나 19로 인해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혐오’도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표현과 차별 사건이 확산되고 있다. 구약시대 나병 환자는 극혐의 대상이었다. 피부가 변해서 보기 흉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염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토라포션에는 나병을 진단하고 그 대상자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 나온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 혐오대상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펴보면서 혐오가 확산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찾고자 한다.

레 13: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환부의 털이 희어지고 환부가 다른 피부보다 깊게 패이게 되면 나병 환자로 확진된다. 여기서 ‘나병’은 히브리어로 ‘짜라아트(צרעת)’다. 그런데 짜라아트는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나병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는 옷과 집안의 벽에 피는 곰팡이도 ‘짜라아트’라고 표현된다. 따라서 짜라아트는 곰팡이균으로 인한 악성 피부병이라고 보는 게 좋다. 짜라아트의 증상을 점검하고 그 사람이 부정한지 정한지를 선언하는 것은 의사의 일이 아니었다. 제사장의 일이었다.정한지 부정한지는 의료적 기준이 아니다. 종교적 기준이다. 그래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레 13: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피부가 희게 색점이 났지만 우묵하게 패이지 않고 털이 희지 않으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7일간 격리한다. 여기서 ‘가두어 둔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싸가르(סגר)’인데, 영어로는 ‘quarantine’이다. 요즘 많이 듣는 말이다. 레 13:5,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격리 1주일 후에 다시 점검해서 병이 퍼지지 않았다면 1주일을 더 격리시킨다. 총 2주를 격리하는 것이다. 코로나 의심자도 2주간을 격리시키는데, 2주 격리가 성경적인 격리 원칙이 아닌가 싶다. 레 13: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총 2주 격리 후에 환부가 엷어지게 되면 제사장은 음성판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환자를 정하다고 선언한다.

자 그런데 양성판정이 나면 어떻게 될까? 레 13: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악성 피부병 환자는 스스로 옷을 찟고 입을 가리며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리고 병이 낫기까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공동체와는 완전 격리되는 것이다. ‘부정하다’는 말은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부정하다’라는 말 ‘타메(טמא)’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더럽혀지고 부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이 악성피부병의 주된 원인을 ‘라숀 하라(לשון הרע)’때문이라고 본다. ‘라숀 하라’는 ‘evil tongue, bad speech, 악한 말’이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하면 ‘혐오 발언’이라할 수 있다. 유대 랍비들은 ‘라숀 하라’가 우상숭배, 간음, 살인을 합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쁜 말이 말하는 대상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과 그것을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암도 모세에 대해 나쁘게 말하다가 나병에 걸린다. 짜라아트, 악성 피부병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흔드는 것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결국 미리암은 짜라아트에 걸려 진영 밖으로 격리조치된다. 그녀는 영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 공동체와의 교제에 부적합한 자가 되었기에 격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짜라아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와는 철저히 격리되야만 했다. 혼자 있는 그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고, 다시 죄에서 돌이켜 정결함을 얻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혐오의 언어들이 넘쳐난다. 특히 인터넷 댓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잔인하고 파괴적인 혐오 표현들로 가득하다. 라숀 하라, 즉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을 격리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는 구석 구석 검은 곰팡이가 피고 있다. 순수해야 할 초등학생들의 교실마저 혐오가 일상언어가 되었다. 어쩌면 전 세계가 혐오의 말에 감염되었기에 지금 모두가 격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혐오는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삶이 힘들거나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고통스럽고 두려운 현실속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 낼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 분노는 강자를 겨누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나보다 약한 사람을 조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싸움 잘하는 애들한테는 혐오 표현을 하지 않는다. 만만하게 보이는 애들, 나보다 약한 애들을 골라 함부로 말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지난 화요일이 홀로코스트 기념일이었다. 홀로코스트 역시 나치의 혐오 발언에서 시작되어 600만 집단 학살로 이어진 인류의 비극이었다. 당시 독일은 경제 위기로 온 나라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히틀러는 국민들의 분노와 두려움을 쏟아 낼 희생양을 찾았고, 그래서 찾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혐오는 혐오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다. 혐오는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력인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혐오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그 사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라숀 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약 3:6, 8-10,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성경은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재미있어서 한 말, 내가 조롱하며 단 댓글 때문에 누군가는 자살을 결심할만큼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위기서 14장에는 악성피부병 환자들을 다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진영 밖에 있는 환자를 진찰하고 그 환부가 나았으면 우슬초로 흐르는 물에 새의 피를 찍어 일곱번 뿌린다. 그리고 ‘정하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7일을 더 장막 밖에 머물게 한다. 이어서 8일 째 되는 날 속건제를 드리게 한다. 속건제는 해를 끼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사이다. ‘라숀 하라’로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해를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는 제사인 것이다. 격리되었던 환자는 속건제를 드리며 완전히 죄사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로 복귀하게 된다. 따라서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례는 그들을 격리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 공동체로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잠시 격리와 참회의 시간을 허용했던 것이다. 

예수님도 나병 환자를 만나셨다. “나를 깨끗케 해달라”는 그의 요청에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포하신다. 그러자 그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지시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모든 부정함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불평하고 비난하고 원망을 쏟아내며 더럽혀지고 부정해진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과 공동체 앞으로 돌려보내시는 분이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 피 흘리셨다. 그 사실을 믿고 주님의 보혈을 우리 마음에 뿌릴 때 우리는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정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이렇게 권면했다. 롬 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 이웃, 우리 옆에 있는 친구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길 원하신다. 혐오 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들의 상처가 보인다. 그들도 괴롭기에 자기 보다 약해보이는 대상을 찾아 자기의 괴로움을 쏟아내는 것이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쉽게 혐오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다. 반면 자기와의 화해를 이룬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과 화해를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하다’는 느낌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정하다”는 선언을 받아야 한다. 요일 1:9절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연약해서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백할 때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정하다고 선언해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용서를 경험해야 우리는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에게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나 자신도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해야 다른 사람들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주일학교 친구들이 학교에서 혐오 표현을 하지 않거나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내 이웃인 친구들을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질 수 있는 십자가가 되길 바란다. 세상은 누구를 조롱하고 힘쎈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약해보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결국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게 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과연 나의 미래가 안전할지, 내가 앞으로 먹고 살 수는 있을지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이 커질 때, 혐오가 그 어느때보다도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예민하게 희생양을 찾고 있다. 교회는 지금 모이는 것만으로도 ‘개독’소리를 듣는다. 교회는 어느새 ‘혐오 집단’이 되었고, 신앙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신앙을 가지고 세상 앞에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혐오와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환대에 굶주려 있다. 진짜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 외모와 조건에 상관없이 나를 용납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평가와 험한 말들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여러 평가와 판단의 말들로 지쳐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속마음은 나병보다 더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사람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거친 말과 혐오 표현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부정하게 된 자를 고치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죄의 문제에서 정함을 얻은 우리들이 혐오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 때야말로 우리가 혐오의 반응을 뛰어넘어 하나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까? Mr. Rogers’ Neighborhood라는 미국 TV 프로에 나오는 노래로 적용점을 찾고자 한다.

There are many ways to say, ‘I love you’
There are many ways to say, ‘I care about you’
Many ways, many ways
Many ways to say, ‘I love you’
There is the telling way to say, ‘I love you’
There is the telling something someone really like to hear
Feeding well, feeding well, feeding well to say, ‘I love you’
Cleaning up a room can say, ‘I love you’
Hanging up a coat before you’re asked to do it
Drawing special pictures for the holidays
And making plays
You’ll find many ways to say, ‘I love you’
You’ll find many ways to understand what love is
Many ways, many ways
Many ways to say, ‘I love you’

방을 청소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따뜻한 말, 격려와 배려의 말을 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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