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5 관계속에서의 거룩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5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5 관계속에서의 거룩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1-2)

오늘 토라포션의 제목은 ‘케도쉼(קדשים)’이다. ‘거룩하라’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던져진 명령이었다. ‘거룩하라’는 말은 참 부담스런 말이 아닐 수 없다. ‘거룩’은 하나님에게나 어울리지 우리에겐 어울리는 말 같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해지길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해지길 원하신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거룩해지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더 거룩해지기 위해 매일 한 시간 기도를 작정할 지 모른다. 성경을 더 많이 읽거나 유튜브로 좋은 설교를 더 많이 듣는 노력을 할지도 모른다. 흔히 생각하기에 “영적”인 것을 추구함으로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거룩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과 상관없이 혼자서 신앙적인 열심을 내는 것을 거룩의 전부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관계적인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하도록 제시되는 것이 거룩이다. 오늘 토라포션에는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과 함께 특별히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이 두 개 나온다. 이웃 사랑이 왜 거룩에 이르는 길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웃 사랑에 대한 첫번째 계명은 레위기서 19장 17-18절 말씀이다. 레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나는 여호와이니라 모든 이웃이 다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우리는 마음으로 미워하고 판단하게 되는 많은 이웃들을 만난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도무지 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 도움이 안되거나 오히려 나에게 해를 끼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사람이 대놓고 나를 헐뜯거나 공개적으로 나를 모욕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판단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은 그 사람을 견책하라고 말한다. 견책하는 것은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침묵하고 있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직면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한 직면을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을 권면하셨다.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갈등가운데 있는 상대와 이야기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그것은 나의 생각을 말함으로 혹시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직면의 말을 통해 그 사람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화난 감정을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나를 화나게 한 그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게 된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분노를 쌓아두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원망과 함께 그 사람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복수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스럽지 않은 이웃을 사랑하기가 힘들다. 대놓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나는 사랑할 수 없다고, 아니 하기 싫다고 항변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 대신에 그 사람에게 나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가지 사항을 덧붙이셨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네 자신과 같이”라는 구절을 덧붙이셨을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별 거부감 없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탄생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존귀함을 부여받았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이웃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람의 잘못과 상관없이 그 사람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나는 여호와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현을 덧붙이신 이유가 뭘까?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기억하고 그분의 질서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고 통쾌하게 원수같은 사람들에게 복수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3:9-10,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맘에 안 드는 이웃을 미워하고,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원수 갚고 싶은 게 우리의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본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본능 대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거룩하다’고 보시는 것이다.

이웃 사랑에 대한 또 다른 계명이 있다.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거류민은 히브리어로 ‘게르(גר)’다. ‘이방인, 외국인’을 말한다. 너희 가운데 살고있는 이방인, 외국인을 자기 같이 사랑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어려운 명령이다. 우리가 좀전에 살펴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보다 더 어려운 명령이다. ‘이웃’은 나와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류민’은 나와는 모든 것이 다른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공유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낯선 사람들이기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근거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다” ‘너희도 애굽에서 거류민 신세였지 않았냐? 그러니 그 때를 생각하고 너희들은 너희와 함께 사는 거류민들에게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다”라는 말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주권이 느껴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한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이 ‘열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방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에게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가족, 우리 이웃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열방의 이방인들에게까지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들을 배려하라는 계명을 주셨다.레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구약시대 이 말씀을 잘 따랐던 사람이 있다. 보아스다.그는 이방인이었던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보아스는 이 일을 통해 룻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자손을 통해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다. 보아스는 이방 거류민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돌봐주다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추수할 때 우리의 본능은 무엇이겠는가? 내 밭의 곡식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내 곡간에 쌓아두겠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본능을 누르고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거룩인 것이다. 거룩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거룩은 내가 나중에 성공해서 기부금을 많이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기회를 만들어 베푸는 것이 바로 거룩인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은 사회적인 약자와 이방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우리를 당신의 거룩에 초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인 편견을 버리고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사랑으로 섬길 때, 하나님은 그것을 거룩하게 보시는 것이다.

거룩은 이처럼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존재 안에 담아낼 수 있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부르셨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성공해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많은 세월에 걸쳐 신앙훈련을 받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권면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배려해주고, 그들이 힘들어할 때 나의 일처럼 돌봐줄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미워하고 판단하는 이웃이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 가까이 함께 사는 아내나 남편, 늘 옆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 기숙사 친구들이 마음에 안들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처음부터 사랑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 미움을 마음에 쌓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기회를 봐서 마음에 불편한 것을 그 사람에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나와 언어와 문화와 종교가 다른 외국인들을 상대할 기회가 많다. 우리는 어느 특정 민족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쉽게 그들을 판단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기다리시는 열방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을 민족 감정이나, 편견 없이 대하고 그들이 외국인이기에 힘든 것에 대해 배려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이웃과 이방인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거룩하다고 보시는 것이다.

지금은 힘이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시대다. 가진 자가 갑질해도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야 하는 사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힘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불행한 꼴 당하며 살지 않기 위해 내가 원하는 크기의 성공과 행복을 성취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고 성공해야 남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는 시도를 유보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비극이자 교회의 비극이다. 교회 안에는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 이웃과 세상에서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힘이 있다고 그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똑똑하다고 그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비판과 미움 대신에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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