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5월 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6 불확실성 시대속에서의 기쁨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3:42-43)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 파는 시대가 되었다. 분명 이렇게 파는 커피를 사먹는 것이 더 편하고 가격도 싸서 좋을텐데, 마음 한켠에 이상한 불안감이 밀려 온다. 사람이 하던 일자리를 로봇이 대신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로봇 때문에 누군가는 커피 판매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간 것이다. 이제 평생직장이란 말은 사라진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초중고 아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 뭐냐 물으면 ‘건물주’라고 답을 한다. 청년들에게도 ‘공무원’이 이상적인 직업이 되었다. 기술혁신이 이루어져서 로봇을 통해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그만큼 생산성은 높아지고 부의 크기는 커진다. 그런데 기술 혁신자들이 광고하는 것만큼 우리의 사회의 미래는 테크노피아의 신세계가 펼쳐질까? 그럴 것이라고 대답이 잘 안나온다. 오히려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뒤따른다. 왜일까? 그것은 기술혁명으로 커진 부의 크기가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먹던 파이까지 로봇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가 불어닥쳤다. 불안과 불확실성 지수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었다. 코로나가 힘든 것은 우리의 생존과 안정감의 기초가 되는 ‘관계와 돈,’ 둘 다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야말로 우리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지수가 가장 높은 때가 아닐까 한다. 다행이 한국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코로나가 진정되는 분위기다. 코로나가 끝나면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전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리라 예상된다. 특히 기술혁명의 파도가 몰아치고, 5G 초연결사회가 신속하게 펼쳐지리라 예상된다. 지금 미국과 중국, 우리나라도 이 5G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 자율주행차 등이 5G 통신을 통해 연결되면서 앞으로 새로운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새로운 미래가 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견한다. 정신 단단히 차리고 마음에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다면 사회의 변화하는 속도에 우리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이처럼 불안과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높아질 때 가장 빼앗기기 쉬운 감정이 있다. 기쁨이다. 여러분은 요즘 기뻐한 날이 얼마나 되는가? 혹시 상황적인 요인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토라포션에는 기쁨의 절기가 나온다. 초막절이다. 왜 이 절기가 기쁨의 절기인지 살펴보면서, 우리 현재의 삶에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레 23: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이 말씀에서초막절에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나온다.레위기서 23장에는 여호와의 일곱 절기들이 다 소개된다. 그런데 다른 절기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없다. 오직 초막절에만 기뻐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래서 초막절은 ‘즈만 심핫테누(שמחתנו זמן),’ ‘우리 기쁨의 절기’란 별칭이 있다.
초막절에는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거기서 살라는 명령이 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살았던 것처럼 일주일 동안 그곳에 지내면서 그 경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그들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루라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미리 알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펼쳐지는 현실은 메마른 광야뿐이었다. 그들은 지속되는 불안정의 시기를 매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절기가 ‘우리 기쁨의 절기’라고 불리웠던 것일까?
유월절은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다. 기쁨의 절기라 불릴만 하다. 오순절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날이다. 이 역시 기쁨의 절기라 불릴만 하다. 그런데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고생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어째서 유대인들은 ‘우리 기쁨의 절기’라고 부를까? 왜 그들은 초막 안에서 즐거워해야 했을까?
초막이 상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측불가능한 현실과 함께 사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그냥 초막 하나 치고 살다가 구름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름을 따라가는 것은 분명 믿음의 행위였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초막절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믿음은 확실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상황과 환경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하나님이 모든 여정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불평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그들이 알 수 없는 내일의 여정을 따라갔다. 광야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여정은 너무도 길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 상황을 끝까지 견딜 용기를 주셨다.
초막절에 유대인들이 초막 속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힘들게 했던 환경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막에서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동행을 기뻐하는 법을 배웠다.
사실 초막은 아무런 자랑거리가 아니다. 많은 민족들은 자신들이 강성했던 때를 자랑할 것이다. 튼튼한 성과 화려한 궁전을 자랑할 것이다. 사람들이 큰 집을 사고, 안정된 직업을 갖기 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불안한 내일을 맞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집과 안정된 수입을 확보할 때까지 자신이 오늘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를 유보한 채 정신 없이 사는 것이다.
초막절은 집이 없어도, 안정된 수입이 없어도 광야를 통과해 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다. 유대인만큼 집을 잃고 쫒겨난 경험을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나라를 잃고 거친 광야로 내몰려본 경험을 이처럼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그럼에도 이 민족이 사라지지 않았던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들이 매년 초막절을 지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초막에 살아보면서 우리 조상들도 이 초막으로 40년을 버텼는데 나도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초막이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길들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거친 광야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문제는 초막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놓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황때문에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막에 살면서도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할 수 있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 광야가 펼져질 지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렇게 퍼질지 누구가 상상했겠는가? 불안은 예고없이 우리 삶에 들이닥칠 수 있다. 우리의 건강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의 직장이, 우리의 생계가 다음 달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몇 달 뒤에 또 이 세상에 어떤 충격적인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무도 위기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통계나 확률로도 그것을 예측하거나 막을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러한 때 초막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상황이 불확실해도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비록 우리에게 광야가 펼쳐진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결국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지점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코로나가 처음 발발했을 때,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수시로 새로운 뉴스를 확인하고, 유튜브에서도 돌고 있는 이야기도 열심히 찾아 들었다. 그 원인을 정확이 알고 싶었고,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고 싶었다. 그래서 불안을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많은 뉴스를 들으면 들을수록 예측은 더 힘들었다. 그러던 중 지금 이 세상의 불안과 불확실성은 예측을 통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처럼 초막 속에서 내일의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지켜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스트레스와 불안장애를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통제를 잃었다는 두려움,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우리는 이전 우리의 일상에서 누리던 샬롬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이 끝나면 우리는 물론 이전의 평안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안’과 ‘불확실성’이란 단어는 코로나 이후에도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될 것 같다. 과학의 진보와 기술혁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불안을 가져다 주고 있다.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는 우리가 저항한다고 그 속도가 늦춰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아야 할까? 나는 우리들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그 변화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 변화가 주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그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을 이야기하는 제사장으로 살아야 하는 게 이 시대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따르는 사람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과 옳지 않다고 하신 것을 구별해내는 사람이다. 지금은 점점 인공지능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는 시대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많은 사람들이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따르고 있다.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신 스마트폰을 열어 구글에게 물어본다. 물건을 사는 것, 식당에 가는 것도 인공지능에게 물어본다. 그렇게 하라고 강요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편리하고 우리가 그것을 원하도록 철처히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 앞에,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던져지는 정보와 뉴스들을 접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그러한 정보와 뉴스들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기준에 옳은 것인지 걸러내야 한다. 그리고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 삶의 패턴과 욕구까지 바꾸는 지금의 트렌드가 정말 성경적인 것인지 구별해내야 한다.
2001년 하버드 대학의 교수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이란 책을 썼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공동체의 참여가 감소하는 현상을 분석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집단에 참여하는 대신 혼자 활동하는 편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은 점점 나 혼자 볼링 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나 다른 모든 공동체에 다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원자화는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즉, 사회적 신뢰가 감소하고, 사람들은 더욱 고립되고, 정치에 덜 참여하며, 이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가 오락의 과잉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사람들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대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 또는 게임을 하는 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코로나는 이러한 경향을 더 심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는 편하게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것 대신 교회 오는 게 더 힘들게 느껴질지 모른다. 혼자 네플릭스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시간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피곤하게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집안에 갇혀서 기술 혁신자들이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연결되고, 가상현실에서 게임을 하는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소비하며 살게 될 지 모른다. 그러한 오락과 가상의 현실에 휩싸여 우리는 공동체를 상실하고, 공동체에 현명한 헌신을 할 의지조차 없는 신인류로 길들여지고 있지는 않은지 분별해야만 한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과학 기술 혁신이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 할수록 평범한 우리 대중들의 불안지수는 더 커져만 가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예측 가능한 통계에 있지 않다. 우리의 안전은 큰 집과 안정된 직장에도 있지 않다. 우리의 희망은 초막 속에서도 우리와 여전히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은 비록 초라할지라도 그 가운데 감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가득한 이 때에도 우리는 오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기쁨을 회복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돌파가 있어야 한다. 초막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그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 끝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붙들어야 한다. 이것이 광야와 같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바라기는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고, 광야와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