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7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5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27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레 26:3-4)

오늘 토라포션은 레위기서의 결론이다. 레위기서의 결론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따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메카니즘이다. 그 강력했던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쇠퇴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봐도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이 민족의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에 따라 고스란히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는 사람이 있고, 저주가 따르는 사람이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원리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주신 말씀이다. 여기에는 십계명을 비롯하여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많은 규례조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고대사회의 계약 문서들을 보면 계약의 당사자들이 그것을 지켰을 때 얻게 되는 혜택 목록과 그것을 어겼을 때 내려질 저주의 목록이 그 문서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다. 마찬가지로 레위기를 마무리하는 26장에서 축복과 저주의 목록이 나온다. 먼저 3-13절에서는 순종에 따른 축복의 내용이 기록된다.

레 26:3,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여기서 ‘준행하다’는 말은 ‘할라크(הלך)’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걷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너희가 내 규례 안에서 걸어가면”으로 직역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이 12절에서 제시된다.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너희 중에 행하여’라는 표현에서도 ‘할라크(הלך)’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너희가 내 뜻 안에서 걸어가면 나도 너희와 함께 걷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레위기의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레위기서에 나오는 축복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행동하실 때 따르게 되는 축복인 것이다. 그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자.

레 26:4-5,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첫번째 축복은 경제의 축복이다. 풍성한 수확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땅은 자연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를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은 원래 나일강이 있는 애굽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돌봐주셨기 때문이다.

신 11:10-15,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적당한 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곳이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 여부를 체크할 수 있는 가장 최적화된 장소였던 것이다.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이 순종했을 때 그들에게 약속된 또 다른 축복은 무엇일까? 레 26:6-7,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두번째 축복은 샬롬의 축복이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샬롬은 내 주변에 원수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여전히 전쟁이 있고, 여전히 원수가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 모든 도발이 제압되는 상태가 바로 샬롬이다. 코로나로 인해 위험 리스크들이 우리 사회에 평소보다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우리 집사님들도 총소리만 들리지 않았지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 매일 전투하러 출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샬롬은 아무 위기가 없는 진공상태가 아니다. 그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샬롬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행동하심을 확신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여러분과 행동을 같이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함께 하시면 위기는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레 26:13,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여기서도 ‘할라크(הלך)’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백성들이 바로 서서 걷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서서 걷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멍에의 빗장’이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며 다시 종의 멍에를 메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위기서 26장 서두에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척도가 되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레 26: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을 따라 걷는 삶이 무너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사라지기에 똑바로 걷지 못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우상이 뭔가?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따라 걷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다. 그런데 우상은 히브리어로 ‘엘릴림(אלילם)’이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헛된 것’이란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상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숭배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헛된 것일 뿐이다. 우상은 결국 우리를 절뚝거리게 만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가로막는 것이다.

14절 이후부터는 우상을 섬기며 불순종한 결과 따르게 되는 저주를 기록하고 있다. 저주는 축복의 반대다. 하나님이 함께 걷지 않는 인생에게 따르는 결과가 저주다. 저주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는 파종한 것이 헛것이 된다는 것이다. 대적이 와서 그것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샬롬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대적에게 패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저주를 선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저주의 결과를 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낭떨어지로 달려가는 아이에게 부모가 “너 거기로 가면 죽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식이 죽기를 바래서일까? 죽지 않게 하려고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도 그 저주의 결과를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경고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게 하시길 원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세워지길 원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처벌의 강도를 높이신다.

레 26:27-28,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일곱 배로 강한 징벌이 따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이 강해진 결과 하늘은 철과 같이 되고 땅은 놋과 같이 된다.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않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의 살을 먹는 일도 벌어진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아람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자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 때 아들을 삶아먹는 일이 벌어졌다. 북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 맞이하게 된 참상이었다. 선지자들이 수차례 경고했지만 그 경고를 무시하고 그들이 대항한 결과였다.

여기서 ‘대항’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케리(קרי)’다. ‘적의적인 마주침’이란 뜻이다. 성경에서 레위기 26장에서만 7번 나오는 단어다. 하나님은 너희가 대항하면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겠다고 같은 단어를 쓰고 계신다. 그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정신 못차리고 다른 우상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원하신 것이다. 내 삶에 우상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보호가 떠나게 된다. 그리고 우상의 통치가 시작된다. 우상이 이끄는 삶이 지속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내 편이 되실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불순종하며 대항할 경우 당하게 될 마지막 저주의 내용을 말씀하신다. 레 26:33,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지금까지 나온 저주의 내용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두 다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멸망했다. 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했다. 바벨론제국 역시 하나님의 저주 선언으로 멸망했다. 그런데 다른 민족과 유대민족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유대민족은 멸망을 경험했지만 멸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일까? 유대민족에게는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저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언약은 회복에 대한 약속으로 끝난다.   

레 26:40-42,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의 저주는 단순히 저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당신의 백성을 언약백성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로 이어진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경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진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회복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른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의 죄악과 부모세대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락된 죄악의 형벌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언약이 있었기에 축복이 있었고, 언약이 있었기에 저주도 있었다. 그리고 언약이 있었기에 저주에서의 회복도 가능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꽃길만 걷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저주의 징계도 허락하시는 과감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하여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똑같은 저주를 우리는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언약백성인 우리들이라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보호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을 때 그분의 보호하심이 떠남으로 징계의 시간을 보내게 될 수 있다. 신약성경은 그 징계의 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히 12:6-10,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실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언약백성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온전히 세우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짧은 인생 동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걷길 원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의 우상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멍에의 빚장을 끊고 바로 서서 걷는 모습을 보고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소중히 여기며 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를 보기 원하신다. 재난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재난이 우리 세대가 하나님과 함께 걷지 못해서 초래된 인재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놓쳤고, 이 시대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결과 시작된 위기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바라기는 그저 이전과 같은 일상의 회복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발걸음이 회복되는 기회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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