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6월 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0 언택트 시대의 교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민 10:1-2)
요즘 ‘언택트’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접촉하다’라는 뜻의 ‘Contact’ 앞에 부정 접두어 ‘Un’이 붙어서 ‘비접촉, 비대면’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코로나 이후로 언택트 문화가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제 반가움으로 내미는 악수가 실례가 될 수 있다. 신체 접촉으로 내가 감염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대면 접촉을 피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언택트라는 말을 처음 접한 건 2018년도 ‘트랜드 코리아’라는 책에서이다. 이 책은 기술발전을 통해 점원과의 접촉없이 물건을 구매하는 ‘언택트’라는 소비경향이 앞으로 확산될 것을 예측했었다. 그 예측대로 이제는 햄버거도 무인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한다. 음식도 배달앱을 통해 굳이 배달원을 만나지 않고도 주문할 수 있다. 이처럼 언택트 문화는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방식이다. 그런데 이제 코로나로 인해 이 언택트 문화는 일상 전반에서 강력한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초중고 학생들은 지금 온라인으로 개학을 하고 원격수업을 듣고 있다. 기업은 출근 대신 재택근무와 화상회의로 업무를 대체하고 무인결제시스템을 활용한 언택트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은 코로나로 ‘집콕’ 중인 팬들을 위해 온라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동안 교회도 현장예배 대신 실시간 온라인 방송으로 예배를 대체했다.
그런데 언택트 문화가 확산되면서 기존 공동체의 의미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코로나가 교회소모임을 통해 확산되면서 이제 교회의 모든 모임 자체가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모이기를 힘쓰던 교회에도 언택트 문화가 새로운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모이는 교회의 시대는 저무는 것일까? 오늘 토라포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가나안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그리시는 공동체는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민 10: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자 이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나팔 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하게 된다. 회막이 완성되고 이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회막을 중심으로 이 많은 백성들이 함께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중’이라는 단어와 ‘진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히브리어로 회중은 ‘에다(עדה)’이고, 진영은 ‘마하네(מחנה)’다.
랍비 솔로베이칙(Soloveitchik)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가 되는 두가지 방식은 바로 ‘마하네’와 ‘에다’였다고 한다. 먼저 ‘마하네’는 군사적인 공동체였다. 적을 만날 때 그들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으로 연결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함께 무리를 이루는 것은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형성된 그룹이 ‘마하네’이다. 방어적인 형태의 공동체인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에다’였다. 회중이라는 히브리 단어 ‘에다’는 ‘증거, 증인’라는 뜻의 ‘에드(עד)’에서 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비전과 이상을 공유하는 증거공동체라는 뜻이다. 이 하나님의 비전과 이상은 결코 혼자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다’가 된 것은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함께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중으로 세워진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주어지고, 언약이 맺어지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수행하는 ‘에다’ 공동체가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의 증인’이라고 부른다. ‘나의 증인’은 히브리어로 ‘에다이(עד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에다’ 공동체로 부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하네’로 구성되었지만, 하나님을 삶으로 증거하기 위해 ‘에다’로 존재해야 했다.
오늘 토라포션 본문은 민수기서 8장에서 12장까지다. 이 다섯 장에 걸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다’로 세워지는 모습들이 기록된다. 먼저 8장에서 하나님은 성막에서 메노라를 켜는 방식을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해 레위인을 구별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민 8:10-11,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들을 안수한다. 안수라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여 희생되는 제물과 동일시 하는 행위다. 제물이 되는 짐승은 안수한 사람의 죄를 쓰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레위인을 안수했다는 것은 레위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물로 바쳐진 존재라는 선언이다. 이처럼 레위인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산 제물(living sacrifice)’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기에 자신에 대하여는 죽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레위인을 보면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레위인들의 삶은 사실 자신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막과 레위인은 별개로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정체성을 긴밀히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존재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레위인이 배치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열두 지파가 진을 치고 있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과 레위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공유하며 ‘에다’ 공동체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민수기서 9장에서 하나님은 온 백성이 유월절을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8장에서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레위지파의 순종은 이제 9장에서 온 백성의 순종으로 확대된다. 그리고10장에서는 은나팔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시작한다. 민 10:33-34,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이 정도면 불멸의 공동체가 광야의 행진을 시작하고 있는 느낌이다. 자, 그런데 11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폭망하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민 11: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들이 원망하자 하나님은 불로 심판하신다. 출애굽기에서도 백성들이 원망한 적이 있었다. 마라의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자 백성들이 원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며,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말하셨다. 무슨 차이일까? 왜 그 때는 심판하지 않으셨을까?
또 한 가지 사건이 있다.민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출애굽한 다른 인종들이 음식 때문에 불평하기 시작했다. 애굽에서 먹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에 대해 불평했다. 이들의 불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전염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울기 시작했다. 이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을 심판하신다.민 11:33-34,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만나를 지겨워하며 불평했던 것은 출애굽기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어 먹게 하셨지, 그들을 심판하지는 않으셨다. 무슨 차이일까? 왜 출애굽기에서는 심판하지 않고 민수기서에서는 가혹하게 심판하셨을까?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이 두 본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신 일이다. 시내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갓 입양된 양자와 같았다. 하나님의 비전과 이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과 이상을 공유되었다. 그리고 언약을 맺는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 계명에 책임을 지는 백성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단순히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에다’가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하네’로 조직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나아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에다’가 되기 위해 그들이 불순종할 때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져 갔던 것이다.
‘공동체’의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다. 공동체는 ‘공통의 생활공간에서 상호작용을 하며 유대감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여기서 ‘공간, 상호작용, 연대’가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요소다. 민수기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진영이라는 공간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으로 상호작용을 했다. 그리고 토라가 그들의 연대를 이루는 가장 강력한 요소였다. 신약의 교회 역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가시적인 모임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모이기를 힘썼던 것이다. 모임을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몸된 공동체를 통해 믿음의 백성으로 자라갔다.
한 몸된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이 사람 저 사람 신경 써야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상처받는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래서 이꼴 저꼴 안보기 위해 교회에 ‘안나가’는 ‘가나안’ 성도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교회에 나가 몸된 공동체를 이루기 보다는 마음에 드는 설교를 영상으로 들으며 언택트 성도가 되어갔다. 언택트는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던 하나의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택트’는 교회의 본질상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산 제물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몸으로 오셨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와 커넥트(Connect)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였다. 성육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성육신이 있었기에 교회는 한 몸된 공동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본 훼퍼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용납의 법’입니다. 용납이란 ‘아파하며 참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너’의 의미는 ‘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너’의 의미는 결코 ‘짐’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짐 지우려 하면 멀찍이 피해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인해 아파하면서도 참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서로로 인한 아픔이 없다면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서로의 짐을 짊어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거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여서 서로를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여서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로 함께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언택트 문화는 앞으로 많은 만남들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언택트는 여러가지로 편리함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공격받거나 피곤해지는 일들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러나 언택트는 우리를 ‘마하네’로 남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에다’로 자라가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비전과 이상을 공유한 ‘에다’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과 보호받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세상은 언택트 문화로 인해 서로 단절되며 더더욱 소외와 불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사랑과 용납의 공동체가 되어 언택트라는 도성에서 힘든 싸움을 하는 영혼들에게 희망의 접촉점이 되야 할 것이다. 교회인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법 안에 연대하여 서로의 짐을 져줌으로 우리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물론 언택트는 우리가 이 비상 시기에 유념해야 할 가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에다’ 공동체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한다. 히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언택트의 시대에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로 모여 그의 법 안에 자라가며, 변함없이 천성을 향해 함께 행진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