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1 불안사회, 정탐의 정석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6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1 불안사회, 정탐의 정석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민 13:17-18)

우리는 위기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또한 위기가 통제되는 안전한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오늘날 사회는 더욱 통제가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만 여겨진다. 사회가 점점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나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진지 오래다. 직장도 점점 더 위기와 불확실성이 가득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가 불어닥쳤다. 불확실성은 증폭되었고, 불안은 우리가 숨쉬고 사는 일상이 되버렸다. 지난 주 미국에서는 60대 한국인이 폭행을 당했다. 한 흑인이 “우리는 중국 바이러스를 원치 않는다”며 무차별 폭행을 가한 것이다. 미국사회가 불안하다는 증거가 계속 되고 있다. 인종차별에 그렇게 반대하면서 불안의 이유를 다른 인종에게서 찾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안사회,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불안한 사회에서는 미래를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 예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나안을 향해 여정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안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에서 어떠한 내일이 다가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의 내일의 삶이 펼쳐질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낸다. 미래를 전망해보기 위함이었다. 오늘은 이들이 정탐했던 과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불안사회, 정탐의 정석’이다. ‘정석’하면 ‘수학의 정석’이 생각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수학적으로 풀어 보면서, 불안한 시대에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애굽을 출발한지 2년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광야 북쪽,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브엘세바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이었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가나안 족속인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있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 1:21)고 말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고 모세에게 요청한다. 이에 모세가 이렇게 말한다. 신 1: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그래서 모세는 열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하게 된다.

자 이제 정탐의 정석, 더하기 편을 시작하겠다. 정탐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여호수아일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호세아’다. 민 13: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 왜 모세는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불렀을까? 호세아(הושע)는 ‘구원자’란 뜻이다. 그런데 여호수아(יהושע)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호세아라는 이름 앞에 요드(י)가 하나 더 붙은 것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모세는 대부분의 정탐꾼들이 불안정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는 호세아가 그들에게 휘둘릴까봐 우려했고, 그래서 그의 이름에 점 하나를 더하게 된다. 요드(י)는 야훼의 첫 글자이기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자다. 모세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먼저 와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의 이름 앞에 요드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뀌면서 여호수아의 정체성도 바뀌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다. 또한 그는 정탐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보다 앞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더해진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첫 번째 공식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을 더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정체성에 하나님을 더할 때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탐의 정석, 두 번째는 빼기다. 정탐군들은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이러한 보고를 내놓는다.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거민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여겼다.이들은 왜 이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혔을까?

랍비 조나단 삭스는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보통 ‘정탐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흐포르(לחפר)’나 ‘레라겔(לרגל)’이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민수기에서는 ‘라투르(לתור)’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라투르’는 ‘탐험하다. 보다’란 뜻이다. ‘투어리스트(tourist)’라는 말인 히브리어 ‘타예르(תיר)’가 ‘라투르’에서 나온 말이다. 투어는 좋은 곳을 보는 것이다. 여행객들은 아름답고 장엄하고 영감을 주는 곳을 간다. 그들은 나쁜 것을 찾으려고 여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라투르라는 단어가 14-15장에 걸쳐 12번 사용된다. 이것은 열 두 명이 정탐하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고 랍비 삭스는 말한다. 그들의 미션은 정탐이 아니라 좋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탐험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 땅의 좋은 면을 탐지하고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그들이 그곳을 정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렇게 말한다. 신 1: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디로 갈지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인도해주시기 않겠는가?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의 좋은 것을 보고도 마음에 담아오지 못했다. 정복 가능성을 산술적으로만 계산했기에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갈렙은 달랐다. 그는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한다. 같이 정탐하고 왔는데 무슨 차이일까? 갈렙은 두려움을 뺀 사람이었다. 반면 열 명의 정탐꾼은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군대로 조직된 60만 대군이었다. 애굽의 군대도 무너뜨리신 하나님이 이끄시는 군대였다. 객관적인 전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의 눈에는 거인 아낙자손만 보였다. 그들은 상황의 불리함만 묵상하며 두려움을 키웠다. 두려움이 주는 환타지를 따라가 보라. 끔찍한 결론을 마음속에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결국은 쫄아버린다. 그들은 스스로를 메뚜기 같이 여겼고 적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 때문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여리고 백성들은 강한 성벽 안에 살면서도 실은 그 안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 민족의 겉모습만 보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두려움의 보고는 삽시간에 전염되었다. 온 회중이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그들을 인도해내신 하나님까지 원망했다.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두려움은 그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다. 그들의 결론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불안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이 쉽게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향수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며 익숙했던 환경을 그려볼 때 거짓안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종이었고, 고된 노역으로 시달리며 못살겠다고 부르짖었던 것을 망각한 것이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두 번째 공식은 두려움을 빼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 상황이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다. 두려움을 뺄 때 상황 뒤에 계신 하나님이 보인다. 흔히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서둘러 결정할 때가 있다. 미래 지향이 아니라 과거로 퇴보하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익숙한 과거에서 안전감을 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남아 있을 때는 어떤 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로 가는 결정이 되기 쉽다. 두려움은 우상이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스며든 두려움을 빼내야 한다. 

정탐의 정석, 세 번째는 나누기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의 믿음을 나눈다. 민 14:7-9,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수학에서 통계는 현상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통계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통계가 오히려 믿음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현상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그 믿음을 나누며 그 믿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세 번째 공식은 믿음을 나누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위험으로 가득찬 곳으로 본다. 자기 힘만으로 그러한 위험들을 통제하고 정복하려 하니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똑같이 세상을 보지만, 그것이 위험으로 가득하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은 믿음의 사람들을 좌절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백성들을 향해 외칠 수 있었던 이유다.

정탐의 정석, 마지막은 곱하기다. 오늘 토라포션은 이 말씀으로 끝난다. 민 15:37-4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유대인들의 옷을 자세히 보면 셔츠 끝에 실 가닥이 달려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찌찌트(ציצת)’라고 불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수기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옷에 찌찌트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라투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다. 찌찌트를 다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모세는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לבבכם אחרי תתרו ולא/ 베 로 타투르 아하레이 레바베켐.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의 마음을 따라 정탐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다. 오늘 토라포션의 정탐이야기는 찌찌트를 보며 너희 마음대로, 너희의 눈으로 보는대로 정탐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결혼한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따라 상황을 해석하고, 눈으로 본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광야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정탐의 마지막 공식은 기억을 곱하라는 것이다. 광야의 세대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그 기억을 증대시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품는 것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현상만 보는 것은 우리를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불안한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너무도 슬픈 사건이다. 믿음이 없어 한 세대가 멸망해버린 이야기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의 세대가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다른 전부를 놓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사회의 불안은 어제보다 오늘 더 커져갈 것이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안전한 것이다. 우리가 보안시설이 잘 되는 으리으리한 집에 산다고 불안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지향적이 될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높은 벽 안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불확실성과 불안은 앞으로 더더욱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불안한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정탐의 정석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이 더해진 삶이 되길 바란다. 두려움을 다 뺀 삶이 되길 바란다. 믿음만을 나누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억을 곱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광야와 같이 불안한 사회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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