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6월 2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2 반역세대에서의 권위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민 16:1-2)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스승의 권위를 존중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고 스승을 밟는다’는 자조적인 말이 생겼다고 한다. 권위자의 권위가 존중되지 않는 시대이다. 자신에게 따끔하게 말해주는 사람을 쉽사리 ‘꼰대’라고 부르는 시대다. 권위에 대한 반역이 쿨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물론 ‘권위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들의 ‘권위’를 흔드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의 권위에 반역하는 사건이 나온다. 광야 40년 기간 중 모세에게 가장 위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리더십의 최대 위기를 맞았던 모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모세를 대적한 중심 인물은 고라였다. 그는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이었다. 모세, 아론과는 사촌지간이었다. 고라는 언제부터 모세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했을까? 출애굽 2년 후 인구조사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인구조사를 마치고 모세는 각 종족의 대표지휘관을 임명한다. 민 3:30, “웃시엘의 아들 엘리사반은 고핫 사람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의 지휘관이 될 것이며” 모세는 고핫 종족의 지휘관으로 엘리사반을 임명한다.
여기서 고핫의 족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 6: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은 네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은 아므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아론과 모세였다. 아론은 대제사장이 되었고, 모세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고라는 고핫의 둘째 아들 이스할의 장남이었다. 당연히 서열상 자신이 가문의 대표지휘관이 될 차례였다. 그런데 모세는 고핫의 네번째 아들인 웃시엘의 아들, 엘리사반을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라로서는 불만스러운 결정임이 분명하다.
지난 토라포션에서 우리는 가나안 정탐 사건을 살펴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생활이 40년 더 지속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모세는 그때까지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지 못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속에서 고라는 반역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힘의 규합에 나선다. 그에게 동참한 자는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르우벤 자손이었다. 르우벤이 누구인가? 야곱의 장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장자의 역할에서 제외된다. 금송아지 사건 이후 제사장직은 레위지파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리더십 역할은 유다와 요셉지파에게 넘어간다. 장자 지파였지만 장자의 역할을 박탈 당한 르우벤지파는 한마디로 현 지도부에 대해 불만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반역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가져봤거나 여전히 힘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고라는 르우벤지파만 포섭한 것이 아니다. 민 16: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이 정도면 유다지파 갈렙과 에브라임지파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파가 고라편에 선 것으로 보여진다.
고라의 주장을 살펴보자. 민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고라는 모세와 아론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리더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리더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리더십을 지위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묘사된 리더십이 아니다. 성경은 모세를 ‘여호와의 종’(민24:5)으로 묘사한다. 성경의 리더십은 곧 서번트 리더십인 것이다. 종으로 섬기기 위해 리더라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고라는 세상의 리더십과 영적 리더십을 구분하지 못했다. 영적 리더십의 자리는 사람이 노력해서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자리다. 우리는 그가 당을 지었다는 표현에서 그의 야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어 ‘라카흐(לקח)’라는 동사가 씌였는데, 이는 ‘Take, 취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자리는 사람이 취하여 얻는 자리가 아니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였다. 고라가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모세와 아론에게도 순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세와 아론을 인간적인 눈으로 평가했다. 물론 모세와 아론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도 못했다. 그것이 무능해 보였을 것이다. 고라는 자신이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면 그처럼 반역의 길로 가기 쉬운 것이다.
자 이제 반역을 대하는 모세의 자세를 살펴보자. 그는 고라의 반역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적인 배신감과 분노가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보복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엎드리는 것이었다. 엎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다. 그는 사람과 직접 상대하기보다 하나님께 먼저 나아간 것이다. 진정한 권위자인 하나님의 권위에만 순복하겠다는 결단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총회 위에 자신을 세우신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반론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엎드린 후 모세가 했던 다음 반응은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는 향로에 불을 담아 다음 날 아침에 가져오라고 말한다. 모세는 자신이 직접 옳고 그름을 가리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긴다. 다음으로 모세가 한 반응은 직면이었다. 민 16:7, 9-11,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직면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직면이다. 다른 사람이 틀리는데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그 사람을 향한 애정이 없다는 증거다. 모세는 그들의 반역이 분수에 지나친 행위라고 직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역은 지금 현재 자기 직분에 감사하지 못하고 대제사장 자리를 넘보는 탐욕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이 여호와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직면한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사람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며 이런 말을 전한다. 민 16:13-14,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는 표현은 ‘속이지 말라, 우리가 더 잘 본다’라는 말이다. 그들은 어쩌면 광야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했을 수 있다. 그것은 모세에게 따지고 들만한 정당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의 눈은 밝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결과는 현실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그들이 노예로 고통받았던 애굽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하는’ 지도자로 묘사한다. 모세와 아론이 광야의 힘든 상황을 몰랐을까? 그들이야말로 따질 만한 많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모세와 아론은 모든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께 순복한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은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모세와 아론, 그리고 고라와 250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향로를 들고 회막문 앞에 선다. 그 순간까지도 모세는 반역한 자들을 스스로 심판하려는 태도가 없었다. 민 16: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모세는 자기의 권위를 임의로 휘두르지 않았다. 자신을 거역하여 일어난 무리들을 스스로 심판하여 처단할 뜻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조치에만 순복한 것이다.
사실 모든 배역의 기원은 사탄이다. 사탄은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반역한 천사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자기 보좌를 세우려 함으로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지금도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이 세대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를 일으키기 원한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따라서 모든 반역과 불순종의 배후에는 사탄의 영이 작용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들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을 멈추게 하려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부모의 권위를 흔들고 불순종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교회의 권위를 흔들고 성경의 기준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폐하려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여정을 멈추실 수 없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 배역의 영을 심판하셔야 했다. 결국 땅이 열리고 고라편에 선 자들은 모두 그 땅에 삼켜졌다. 그들의 배역이 음부의 문을 연 것이다. 분향했던 250명도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불살라졌다. 다음 날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모세와 아론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이 죽었다는 원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회중들도 멸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그리고 회중을 위한 중보자로 나선다. 이미 염병의 심판이 시작되어 만 사천 칠백명이 죽었다. 모세는 급히 아론에게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라고 지시한다. 모세는 아론을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게 했기에 더 이상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고라의 반역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먼저, 권위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 권위에 순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철저히 권위에 순복하셨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자신을 세우신 대표 권위자인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팔로워가 되었기에, 예수님은 때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한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팔로워가 될 수 없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인 것이다.
우리는 왜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모님이 하나님께서 가정에 세우신 대표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엡 6:1-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잘 되기 원하는가?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 부모님의 뜻을 잘 따르는 팔로워가 될 때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을 잘 따르는 팔로워가 된다. 직장에서도 여러분이 따라야 하는 대표 권위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과 지시사항이 이해가 안 되고, 맘에 안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직장에서도 대표 권위에 대해서 마음을 다해 순복해야 한다. 여러분이 팔로워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후에 여러분이 대표 권위의 역할을 하게 되는 때가 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들을 통해 진행된다.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권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은 힘을 규합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흔들려 한다. 합리주의와 인본주의로 결국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사탄의 영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침을 튀기며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권위자들에게 반항하고 기존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쿨한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이다. 지금 세대는 자신의 기호에 맞는 권위자가 나타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순종하지 않고 삐딱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는 세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 권위자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권위에 가까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가까이 있는 자를 결국 세워주신다. 하나님이 세우신 대표 권위에 왜 순복해야 하는가? 그 대표 권위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위에 순복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에 이르는 길을 끝까지 믿음으로 걷는 자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분 앞에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만질 수 있길 바란다. 그리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가 이 세상에 더욱 드러나는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