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8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8 쉐마의 본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여러분은 죽기 바로 전 어떤 말을 하고 죽을 것 같은가? 유대인들이 죽기 직전 암송하는 말이 있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 유명한 쉐마의 첫구절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쉐마를 암송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히브리어 알파벳 아인(ע)과 달렛(ד)이 다른 글자보다 크게 씌어져 있다. 두 자를 합하면 에드(עד)라는 단어다. ‘증거, 증인’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다른 사람에게 증거해야 하는 사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바벨론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 남자아이가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바로 쉐마의 첫구절이라고 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매일 하루 두번씩 이 말씀을 암송한다. 유대인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일 그들의 전 인생을 지배하는 신념이 바로 ‘쉐마’인 것이다. 이 쉐마의 말씀이 유대인이 아닌 우리에게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모세는 이제 가나안 진입을 앞 둔 광야 2세대에게 설교한다. 그의 120년 인생을 건 설교였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다음 세대들이 자신의 말을 명심하길 원했다. 여기서 ‘쉐마’는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 동사 ‘샤마아’의 2인칭 단수 명령형이다. ‘너는 잘 들으라’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엄마 아빠 말씀 잘 들어라’고 하실 때가 있다. 이것은 단지 리스닝을 잘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엄마 아빠 말에 순종하라는 말이다. 쉐마는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것이다.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라는 명령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우리 하나님이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선포한다.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살 길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주(主)는 그들의 옛생활을 주관했던 애굽의 신들이 아니었다. 또한 가나안 원주민들이 복받기 위해 섬기는 가나안의 신들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모든 나라는 각자 섬기는 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신들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만들어낸 신에 불과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오직 유일한 신인 것을 이스라엘 다음세대가 명심하길 원했다.
세상은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계속해서 우상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세상속에서 하나님 한 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신앙은 너무도 중요하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욕망을 따라 만들어내고 섬기는 우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분명한 선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단지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말한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자,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세가지로 나온다. 먼저 마음을 다하는 사랑이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לב)’다. 레브는 ‘심장’이란 뜻도 있다. 심장이 뛰는 사랑, 그것은 마음이 나뉘지 않는 사랑이다. 히브리어로 ‘하나’가 ‘에하드’인데, 바로 에하드의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여자도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능력있는 남자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은 에하드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뉘지 않는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는 하나의 사랑이 요구되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인생의 모든 상황을 자신의 이기적인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사의 좋고 나쁨에 대해 하나님 중심의 관점을 갖는다. 하나님이 인생의 진정한 주관자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고난의 순간, 역경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힘들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내가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두번째 표현인 ‘뜻을 다한 사랑’은 뭘까? 본문에서 ‘뜻’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נפש)’다. 네페쉬는 ‘숨, 호흡’이란 뜻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을셨을 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즉 호흡하는 존재, ‘네페쉬 하야(חיה נפש)’가 된 것이다. 따라서 뜻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은 너의 전 존재, 즉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쉐마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거기서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번역되어 있다.
네페쉬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랍비 아키바가 로마군인들에게 잡혀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을 당할 때 그는 쉐마를 암송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한평생 쉐마를 암송하며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갈등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면 ‘뜻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는데, 오늘에야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는 쉐마를 암송하며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뜻을 다한 사랑은 결국 내 목숨, 네페쉬(נפש)를 드릴 수 있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세번째, 힘을 다한 사랑은 무엇일까? 힘으로 표현된 히브리어는 ‘메오드(מאד)’다. 메오드가 붙으면 ‘매우’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메오드가 명사형으로 쓰이면 ‘힘, 능력, 부’를 뜻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 재력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너의 모든 소유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인생이 물질 소유를 통해 확장되고 풍부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 삶의 부요함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려 한다. 따라서 힘을 다한 사랑은 나의 모든 능력과 소유를 다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말한다.신 6:6-7,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여기서 ‘부지런히 가르치다’는 히브리어로 ‘솨난(שנן)’이다. ‘솨난’의 원래 의미는 ‘갈아서 날카롭게 하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으로 적용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교육방법은 구전을 통한 반복학습이다. 반복 교육을 통해 그 내용이 날카로운 칼처럼 자녀들의 삶을 뚫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강론하라’는 것은 강해 설교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토라 교육은 랍비가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하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부모를 통해 자녀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신6:8-9,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차는 것이 테필린이다. 그리고 모든 문을 드나들 때 입맞추는 것이 메주자이다. 테필린과 메주자 안에는 쉐마의 말씀이 넣어져 있다. 그들은 매일 기도할 때 쉐마로 무장하고, 집밖을 드나들 때마다 쉐마에 입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차고 있는 테필린과 그들이 입맞추는 메주자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열심을 보게 된다. 그러한 열심이 있었기에 많은 고난 속에서도 그들은 토라의 말씀을 지켜내고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성공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했다. 왜 실패했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가지 규례와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하나님’ 한 분을 사랑하는 것을 놓쳐버렸다. 왜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듣는 것, 즉 쉐마에 열심을 내었던 그들로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말한다.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예수님을 보내어 그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었다. 예수님은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다고 하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이었다면 그 말씀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 때문에 귀가 가리워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쉐마 신앙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적용하느라 정작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은 중세시대에 유대교 교리로 한층 강화된다. 13세기 유대 교육서인 ‘세펠 하히눅’은 신명기 6장 4절 쉐마의 내용을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계명으로 이해한다. 즉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선언으로 보는 것이다. 12세기 유대교의 핵심 교리를 체계화한 람밤(마이모니데스)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다”라는 신명기 6장 4절 말씀을 ‘하나님이 형체를 가지지 않은 분이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증거’로 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형태를 가지지 않으셨기에, 그가 나뉜다거나 다른 존재로 분리되는 형체적인 사건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하나 외에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라든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성육신하셨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유대교 경전 해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2세기 랍비 라쉬는 신명기 6장 4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이제 우리 하나님이신 여호와는 다른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주가 될 것이다.”
이러한 영향력으로 쉐마신앙은 중세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의 민족신앙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유대교 교리는 쉐마교육을 통해 어려서부터 주입된다. 우리 리노이 자매도 하나님 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마치 유대교를 버리고 다른 이방종교로 개종하는 배신 행위로 여긴다. 그래서 예수 믿는게 너무 힘들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쉐마신앙으로 인해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유대교에서 믿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교리에 갇힌 민족적인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와 민족을 한없는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쉐마교육은 사실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다. 그들이 문자적으로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쉐마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구원의 소망은 없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쉐마’신앙이 죽어야 이스라엘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막 12:29-31,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처음에 신명기 쉐마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거기에 레위기 말씀을 더하셨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또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을 강조하신 이유이다.
유창이 초등학교 때 교장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통 유대인들의 신앙적 열심이 대단할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은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분은 소위 세큘라 유대인이었다. 같은 유대인이 종교적 열심을 가진 정통 유대인들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그분은 오직 자신에게 전해지는 사랑을 통해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지, 십일조를 많이 내는지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전해지는 사랑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포로생활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고 상처였다. 그래서 그들은 포로 이후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더욱더 종교적 열심에 매달렸다. 율법을 완벽히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규례와 유전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과 이웃을 더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종교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려 해선 안된다. 메마르고 형식적인 종교인이 될 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함께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벤허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 벤허가 자기의 집 문에 달린 메주자를 만지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자신이 성공한 유대인으로 살아갈 때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습관적으로 메주자를 만지고 지나간다. 그 후 그는 누명을 쓰고 노예선에 끌려 간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집에 와보니 사랑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홧김에 메주자를 내려쳤고 메주자는 깨져버린다. 그 후 그는 예수님이 못박히실 때 그 분이 자기가 노예로 끌려갈 때 물을 준 분임을 깨닫는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자신의 죄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깨진 메주자 사이로 보이는 쉐마 양피지를 정성스럽게 만진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사랑, 쉐마의 본질을 만지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만져야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만져야 하나님을 목숨 다해 사랑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출애굽 때 문설주에 발라진 것은 어린 양의 피였다. 그 피가 발라졌기에 죽음이 넘어가고 구원이 임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메주자를 만지며 그들을 대신하여 피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만져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쉐마의 말씀은 단순히 메주자를 만진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의 문 위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만져야 비로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쉐마의 본질은 외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몸에 테필린을 차고 메주자에 입 맞춘다고 그 본질의 의미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0:27-30,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처럼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인정할 수 있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이 쉐마의 본질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통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되길 소원한다.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우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을 섬기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 유일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을 다해, 내 목숨을 다해, 내 능력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그분을 향한 사랑을 우리 자녀들과 다음세대에도 증거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온 세대가 형식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