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39 헤세드의 사람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8월 8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39 헤세드의 사람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신 7:12)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이 무엇일까? 나는 ‘헤세드’라는 단어를 꼽고 싶다. 오늘 본문에는 ‘인애’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오늘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하신 헤세드가 무엇인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길 원하셨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신다. 신 7:5-6,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주류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여기서 “기뻐하시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샤크(חשק)’다. 이 말은 ‘사랑하다. 욕망하다’라는 뜻이다. 창세기 34장에서는 세겜이 디나를 ‘연연하다’라는 말에 하샤크가 사용되었다. ‘하샤크’는 이처럼 한 아름다운 여성에 대해 한 남자가 품는 강력한 애정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왜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쏟으셨을까? 그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서일까? 7절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의가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앗수르와 비교해볼 때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을 뿐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신 이유를 8절에서 설명한다. 신 7: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 말씀에 의하면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 즉 언약 때문이었다.

모세는 이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설명한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여기서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그의 언약을 지키시고 인애를 베푸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트’이고, 인애는 ‘헤세드’다. NIV성경에서는 이 두 단어를 합쳐서 ‘사랑의 언약(the covenant of love)’이라 번역했다. 그러나 원어성경에서는 ‘언약과 인애가 분명 구분되어 있다. (하베리트 봐하헤세드(שמר הברית))

하나님은 ‘언약’과 함께 왜 ‘헤세드’를 이행하시는 분으로 소개될까? 언약을 이행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걸까? 고대 근동지역에서 ‘베리트’는 군주가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을 자기보다 약한 군주나 백성에게 조건을 걸고 맺는 것이다. 보통 ‘베리트’는 계약의 당사자들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며 맺게 된다. 그리고 그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시에는 그 쪼갠 고기처럼 무자비하게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처럼 고대 근동의 ‘베리트’는 강자에게 유리한 계약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약자를 배려한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도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의 형상으로 홀로 지나가셨다. 전적으로 이 언약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하나님은 자신과 계약을 맺기에 턱없이 부족한 인간의 죄성을 아셨다. 그래서 언약만이 아니라 ‘헤세드’를 더하신 것이다. 따라서 헤세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이 언약에 실패하더라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헤세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호세아 선지자에게 바람난 아내 고멜을 데려와 다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호세아가 바람난 아내를 참고 데려왔듯이 하나님은 바알과 바람난 이스라엘을 참고 기다리시면서 헤세드를 베푸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결국 심판하신 것도 하나님의 헤세드였다. 당신의 언약백성을 다시 돌이키기 위한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인 헤세드가 언약백성의 삶에도 그대로 드러나길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헤세드의 삶을 사는데 실패한다. 호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여기서 ‘인애’가 바로 헤세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 공동체 안에 헤세드가 사라진 것을 탄식하셨다. 헤세드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처럼 그 공동체 안에 희미해진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사항은 문자적으로 잘 지켰는지 모른다. 십일조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하루 세번의 기도를 잘 드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헤세드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서 헤세드를 원한다. 제사를 원하는게 아니다. 계약을 잘 지키는 것보다도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 여기서 ‘헤세드’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평행법으로 표현되었다. 즉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사람이라면 헤세드의 사람이 되야 한다는 것이다.

헤세드의 사람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있다. 룻기서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보여준 사랑이 바로 헤세드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룻3:10,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여기서 ‘인애’라는 말이 바로 헤세드이다. 젊은 남자를 따라 재혼하지 않고 늙은 시어머니 생각해서 나오미를 따라 나선 것이 룻이 베푼 헤세드였다. 또한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사랑도 헤세드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룻 2:20,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은혜’란 말이 헤세드이다. 보아스는 룻이 외국인이었음에도 그녀에게 헤세드를 베푼다. 보아스는 또한 모압여인인 룻을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룻의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기업을 물러주는 고엘의 역할을 자처한 행위였다. 그는 큰 재산의 손실까지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빚을 갚아준다. 그리하여 그는 쓰러져 가던 한 가정의 구원자가 된다. 헤세드는 이처럼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헤세드는 공동체안에서 어떤 대상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유익이 되도록 베푸는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이 땅에 고엘로 오셨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업 무를 자로, 구원자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룻처럼 이스라엘의 언약 밖에 있던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들어오는 축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새언약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은 언약이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만으로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 헤세드를 베푸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할 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비판했다. 그 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신다. 여기 씌인 ‘긍휼’이란 단어가 바로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헤세드가 무엇인지 가르치신 것이다. 헤세드는 받을 만한 자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까지 베푸는 사랑인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열정적인 사랑이 바로 헤세드다. 우리는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약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에 빠져있던 자들이었다.

바울은 선언한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계약 위반자이며, 그리하여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깨진 고기 사이를 횃불이 되어 지나가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맺은 당신의 언약에 홀로 책임을 지셨다. 언약을 위반한 우리들을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헤세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처럼 우리가 헤세드의 사랑을 하기 원하신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끌어안는 사랑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 해주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을 자격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조건을 떠나 베푸는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헤세드는 감정이 일어나서 하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순히 맹목적인 종교적 열심보다도 이 세상 가운데 그의 인애를 실천할 헤세드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지금은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이다. 다원주의적 가치가 점점 팽배해지는 이 시대는 기독교를 환영하지 않고 점점 더 적대적이 되고 있다. 위험과 위기가 터지면서 세상은 점점 더 ‘공존’보다는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서 살기에도 버거워지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떻게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으며 세상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헤세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헤세드가 없기에 멸망했다. 헤세드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 그 사회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된 것 같다. 계약만큼 일하고 계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쉽게 서로에게 분노한다. 언약으로 한 결혼도 계약처럼 변하고 있다. 내가 힘들다고 본전 생각이 난다면 그것은 언약이 아니라 계약인 것이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그러한 계약을 초월한 헤세드다.  

하나님은 지금도 헤세드의 사람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시대를 탓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고 헤세드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헤세드는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손해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그것을 실천하기로 선택하는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헤세드의 사랑은 나의 손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내가 더 수고하고 손해보더라도 남을 살리는 것이면 하는 것이다. 남편이 힘들어도, 아내가 힘들어도, 자녀들이 힘들어도, 직장에 있는 동료가 힘들어도 끝까지 헤세드를 지키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진정한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다. 그 언약은 헤세드를 통해서 성취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그 헤세드를 실행하는 언약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인종과 혈통과, 모든 증오와 경계를 넘어 이 세상에 넘쳐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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