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9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3 기쁨을 경작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신 26:11)
‘나 나흐(נ נח)’는 정통유대인 그룹들 중 하나다. 이들은 고인이 된 랍비 나흐만(Nachman of Breslov)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랍비 나흐만은 평소 단순한 삶과 기쁨으로 사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기도 중간이나 기도 후에 박수치고, 노래하고, 춤을 추도록 격려했다. 그러한 방식이 그들을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로 이끌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래서 나 나흐 하레딤들은 거리에서 테크노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며 랍비 나흐만의 가르침을 전도한다. 그들의 삶의 모토는 히브리어로 ‘씸하(שמחה)’다. ‘기쁨’이란 뜻이다. 이들처럼 단순하게 살고 매일 노래하고 춤 추며 산다면 기쁨을 유지하며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같은 코로나 상황에서 기뻐할만한 일들이 많이 사라졌다. 맛있는 것을 사먹는 즐거움,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 거리를 걸으며 쇼핑하는 즐거움도 사라졌다.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기쁨을 유지하고 있는가? 너무 우울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신명기 말씀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우리의 일상에서 기쁨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오늘 토라포션에서 기쁨이라는 내용이 두가지 맥락에서 나온다. 첫번째는 신명기 26장 11절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가나안 땅에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싸마흐타 베콜 하토브(הטוב בכל שמחת)’ ‘모든 좋은 것에 너는 기뻐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씸하’가 명령형 동사로 씌였다.
두번째는 신명기 28장 47절이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여기서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란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로 ‘베씸하 우 베투브 레바브(לבב ובטוב בשמחה)’인데 ‘씸하’가 명사로 사용되었다. 자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씸하’가 저주 계명들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가 철 멍에로 너를 멸할 것이라’ 이 모든 저주가 일어나게 되는 이유가 바로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금은 황당하다. 기쁨 없이 사는 게 삶의 최선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쁨을 잃고 산다고 그것이 저주받을 일이거나 물론 죄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주리고, 헐벗고,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씸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씸하는 성경에서 ‘기쁨, 즐거움, 행복’ 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씸하는 번역으로 옮길 수 없는 미묘한 의미가 있다. 기쁨, 즐거움, 행복은 모두 개인이 홀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씸하는 개인적인 감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공유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며 느끼게 되는 감정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첫 소산을 드리는 즐거움에 아무도 예외되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의 무거운 책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추구하는 것 대신, 상대적으로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추구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놓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사회속에서 산다. 그런데 행복과 번영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확장하는데 더욱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덜 가진 사람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사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면 그 사회에서 ‘씸하’는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회는 물질적으로 번영을 이루었을진 모르지만, 함께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서는 그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씸하는 내가 얼마를 가졌는가에 따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많이 벌어서 많이 쓰기 때문에 커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눌 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씸하’라는 감정이다. 그것은 소유의 넉넉함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전도서에는 ‘씸하’라는 말이 17번 나온다.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하는 전도서에서 ‘씸하’가 이렇게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헛되고 헛된 인생 속에서 함께 누리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내린 결론들을 살펴보자. 전 3: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לשמוח)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ישמח)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ישמח)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전도서에서 소개되는 ‘씸하’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이다. 그런 사람은 내일 벌어질 일들 때문에 염려하지 않으며, 내게 다가온 오늘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내 손에 지금 주어진 일을 자기 몫으로 생각하며, 그 일을 즐겁게 감당한다. 여러 해를 살면서 캄캄한 날들을 맞이 할 때도 있지만 늘 기쁨을 유지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경작한 기쁨의 열매는 결국 그가 속한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맛볼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삶에 만족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기쁨과 관련하여 한가지 요즘 상황을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는 지금 대면 예배가 금지되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소모임으로 모여 기도하며 삶을 나누는 코이노니아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언론은 유독 교회를 지목하며 모든 방역 실패의 문제를 교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회라는 존재가 사회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교회라는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문제아 취급을 한다. 교회인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기쁨으로 누렸던 예배와 모임의 방식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요즘 이스라엘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의 상황이 있다. 설교 초반에서 소개한 나 나흐 하레딤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매년 유대인 신년인 로쉬 하샤나에 우크라이나 우만(Uman)이라는 곳으로 순례를 간다. 그곳에 그들이 추종하는 랍비 나흐만의 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매년 6만명 정도의 나 나흐 하레딤이 이곳에 모이는데, 유대인 신년에는 비행기 값이 네 배로 뛴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그곳으로 순례하는 것을 그들의 의무이자 권리로 여긴다. 그만큼 그들이 영적으로 누리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쁨의 순례에 이스라엘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코로나 확산의 우려때문에 정부가 우크라이나 여행을 금지한 것이다. 이에 나 나흐 하레딤들은 데모를 하며 더 이상 네타냐후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랍비 Alon Goshen-Gottstein의 기고글을 읽게 되었다. 그는 40년 동안 나 나흐 하레딤과 함께 기도했던 사람이었고 30년 넘게 우만 순례를 했던, 그야말로 나 나흐 하레딤의 내부자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한다. “우만에 가는 것은 특권이고 축복이고 영적인 기회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가 아니다. 특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는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우만 순례가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 권리는 행사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재정적으로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거나 의료체계상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면 그 권리는 행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최근 우만 순례가 하나의 규범처럼 되었지만 30년 전만해도 규범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우만 순례가 개인에 대한 위험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위험의 요소가 있을 때, 그것은 실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누군가 종교 행위를 할 때, 그것이 공동기도이건, 순례이건, 대면예배이건, 다른 사람의 안전을 무시한 행위라면 그러한 종교행위는 우상숭배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위험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적 기쁨과 갈망을 성취하기 위해 감행된다면 그것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자아의 우상숭배라고 그는 경고한다.
이 분의 글을 읽으며 한국 상황이 겹쳐졌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기쁨을 위해 익숙하게 추구하던 예배와 모임속에서 스스로 세운 우상의 요소는 없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대면 예배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드리는 예배가 나만의 행복과 영적기쁨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날 교회는 예배공동체임을 자랑하지만 또한 죄인을 부르고 환대하는 공동체인지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은 긍휼이 흐르는 곳이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약한 자들도 함께 누리는 씸하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곳이다.
한동일 변호사의 ‘라틴어 수업 2020’이란 기고글을 읽었다. 그는 이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로 나뉜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하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된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 종교의식, 종교선전, 종교교육 및 종교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기본권이나 사회공동체 질서와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헌법 제37조 2항에 의하면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현재 코로나 19의 확산 예방을 위해 국가가 교회에 대면 예배를 금지한 것은 ‘상대적 자유’인 종교행사를 일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이고 절대적 자유인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는 교회의 생명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권고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따라서는 안된다. 그동안 교회는 생명을 위협 당하는 순간에도 모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모이는 것만으로도 안전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과연 교회의 최선은 무엇일까? 모두의 안전과 기쁨을 위해 잠시 우리가 익숙했던 방식의 모임을 멈추는 것이 아닐까? 신앙의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를 말하기 보다는 교회의 책임을 말할 때라 생각한다. 요즘 코로나 세상을 맞이하면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 퍼붓는 말들을 많이 듣게 된다. 이러한 때 교회인 우리는 그동안 세상을 대했던 방식을 되돌아 보면 좋겠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 나라 안에 포함시키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교회인 우리가 우리만의 행복과 영적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상과 함께 나누며 즐거워하는 전환점이 되면 좋겠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 씸하가 우리 사회와 세상 속에서 경작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