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9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45 믿음으로 여는 미래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8)
사진 한 장 소개하겠다. 우크라이나 사진 작가 야로슬라브 다닐첸코(Yaroslav Danylchenko)의 ‘모나리자 Covid 19 에디션’이다. 마스크를 쓴 모나리자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녀의 미소를 찾아볼 수 없다. 코로나 이후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로 기업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내가 급작스럽게 퇴사를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직장인이 76.4%나 된다. 몇 달 참으면 될 것 같았는데, 8개월째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으로 불면증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마스크를 쓰고 밖에 나갈 때마다 경직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 같다. 가뜩이나 이방인으로 이스라엘에서 사는 게 쉽지 않은데, 지속되는 코로나 상황으로 우울증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된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코로나가 잡히지 않고 있는 미래의 시간은 우리를 더더욱 불안하게 한다. 어제 코로나 확진자는 5300명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신년이 시작된 어제 오후부터 이스라엘은 전국적인 봉쇄에 들어갔다. 로쉬 하샤나 신년의 새 아침을 우리는 락다운(lockdown)과 함께 시작하고 있다. 참 우울한, gloomy한 신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신년에 우리를 포함해서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들 마음 속에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것은 새해 우리는 이 불안감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오늘 본문에는 약속의 땅 앞에 선 광야 2세대들이 나온다. 그들 역시 불안했다. 그들 앞에는 그들이 상대해야 할 가나안 거인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껏 인도했던 모세는 이제 죽음이라는 운명 속으로 사라지게 될 시점이 다가왔다. 고난의 시기에, 그래도 모세가 있었기에 그들은 광야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런 지도자 모세가 사라진다는 것은 광야 2세대들에겐 트라우마 같은 사건임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는 불안이 증폭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조치를 취하셨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불안한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들이 불안에 대처하는 해법을 찾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 속에서 두려움을 키우고 있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을 때 불안과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것은 우리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모세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깊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불안해 하는 백성들을 향해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신 31: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불안에 떠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전을 추구한다. 그 추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힘들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관계와 돈’을 통해 안전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안전감의 기반이 되고 있는 ‘관계와 돈’ 둘 다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로 직업을 잃었다. 이전만큼 실적이 좋지 않거나, 아예 비지니스 자체를 하지 못하는 상황가운데 놓여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깊이 드리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따르면 우리는 불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야 할 때이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그의 안전감의 기반이 되었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믿음에 의해 움직여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의지했던 안전한 기반을 뒤로 하고 그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를 부르신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관계와 돈이 그의 버팀목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그의 미래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힘이 되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불안한 환경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 늘 원수에 쫒기던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예측할 수 없이 펼쳐지는 내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이 매일 나의 삶에 실제가 돼야만,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신 31:11-13,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모세는 7년에 한 번 초막절에 온 백성들이 한 곳에 모여 율법을 낭독하라고 명령한다. 모세오경을 한 자리에서 온 백성이 듣도록 낭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명령한다. 왜 그들은 자녀들에게 잘 먹고 잘 사는 비지니스 전략을 가르치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게 했을까? 그것은 말씀이 이스라엘 민족 생존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말씀 전수가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밝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유대 민족만큼 많은 고난을 겪은 민족이 없다.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가고, 그들은 이천년 가량 전 세계에 흩어져 온갖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제국은 다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유대 민족만큼은 멸절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겔 37:11-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유대인들은 마른 뼈도 살리겠다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도, 그리고 죽음의 난민 수용소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이들이 이 소망의 끈을 놓치 않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무덤을 열고 그들을 거기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다. 다시 나라로, 한 민족으로 회복하신 것이다. 모든 삶의 기반이 무너질 때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때 우리는 마른 뼈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무덤이 열리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는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모세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곳에 모여 성경을 낭독하는 장면이 느헤미야서에 나온다. 느 8:2-34,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일곱째 달 초하루, 즉 유대인들의 신년에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성경사경회가 벌어진 것이다. 느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말씀을 듣자 백성들에게서 믿음의 감각이 살아났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는지 그들 안에 통곡이 일어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말씀을 들어야 생긴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감각이 살아난다. 말씀을 들어야 나와 우리 공동체가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는지 통곡이 나온다.회개라는 히브리 단어 ‘테슈바’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준으로 돌아갈 때, 개인의 부흥 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부흥이 시작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회복돼야 이 민족은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민족과 다음 세대에게 들려질 때, 모두가 다 망할 것 같은 절망과 불안 속에서도 다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랍비 문헌 미쉬나에 의하면 하나님은 로쉬 하샤나에 세 권의 책을 펼친다고 한다. 각 사람의 행실에 따라 세 권의 책에 각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다고 한다. 의인은 즉시 생명책에 적혀 ‘영원히 살 것’이라고 기록된다. 악인은 즉시 사망자 명단에 기록된다. 의인도 아니고 악인도 아닌, 중간에 속한 사람에겐 대속죄일까지 열흘 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어디 속해 있을 거라 생각할까? 중간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 이 기간 본격적으로 참회한다. 구제비도 많이 낸다. 이들은 이 열흘 간의 기간을 야밈 노라임, ‘경외의 날들’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열흘은 자신의 미래 운명이 달렸기에 1년 중 가장 불안한 기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열흘 간은 유대인들이 가장 착해지는 기간이기도 하다.
히브리 성경에서 유대인 신년은 ‘욤 테루아(תרועה יום)’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나팔을 부는 날’이란 뜻이다. 그리고 대속죄일은 생명책이 닫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날이다. 의인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고 악인은 영원한 사망으로 나아가는 날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재림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이 흰보좌에 앉아 최후 심판하실 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계 20:12, 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유대인들이 지키는 가을 절기는 이처럼 장차 우리가 듣게 될 재림 나팔소리와 최후 심판에 대해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계시는 분인데,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는 과연 언제일까? 랍비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씨름했다. 그들의 결론은 이 열흘 간의 경외의 날들이 바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를 찾고, 그를 불러야 할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다. 그러나 그분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들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시간의 굴레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믿음으로 이끌어주시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성경은 말한다. 요일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코로나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불안을 느껴야 한다. 즉 우리에게 이 생명이 없는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불안한 시대를 우린 지금 통과하고 있다. 단지 생존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불안으로 맞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죽음의 무덤을 열고 거기서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사망을 결정하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열흘 간의 기간에 우리 모두 특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회복하길 원한다. 이 열흘 동안 믿음의 감각이 살아나길 원한다.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이면 마른 뼈도 살아난다는 믿음, 그 믿음이 회복되길 원한다. 기도를 통해서든, 말씀을 통해서든 여러분 안의 믿음의 채널이 활짝 열리기 축원한다. 믿음을 흡수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혜가 있길 축원한다. 믿음의 사람만이 갈 바를 알지 못해도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만이 모두가 불안해 하는 환경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이다. 불안이 전염되는 것처럼 믿음도 전염된다. 바라기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공동체가 새롭게 되길 원한다. 이 불안한 시대에 믿음으로 미래를 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