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46 마음에 담을 노래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9월 26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6 마음에 담을 노래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신 32:44)

2016년 노벨문학상은 미국 대중가수인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노래를 통해 귀를 위한 시를 썼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32장에는 귀를 위한 시가 나온다. 모세가 죽기 전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모세는 이 노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담겨지길 바랬다.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 노래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서 있길 원했다. 이 노래에 어떠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신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모세는 하늘과 땅을 향하여 노래를 시작한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아지누 하샤마임(השמים האזינו)” 하아지누는 ‘듣다’라는 뜻의 동사 ‘아잔(אזן)’에서 온 말이다. 히브리어로 귀가 오젠(אזן)인데, 아잔은 ‘손으로 귀를 펴다’라는 말이다. 즉 ‘귀를 기울여 듣다’라는 뜻이다. “땅은 들을지어다” “티슈마 하아레츠(הארץ תשמע)” 티슈마는 역시 ‘듣다’라는 뜻의 동사 ‘샤마(שמע)’에서 온 말이다. 듣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누구의 음성을 듣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양식과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경전인 미드라쉬 라바는 귀가 우리 몸의 모든 기관에 생명을 준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귀로 토라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께도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많은 소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 말씀 아닌 세상의 다른 음성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형성된다.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삐뚤어진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일주일동안 말씀과 기도생활을 멀리해보라. 삐뚤어진다. 그것인 멋인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모세는 왜 하늘과 땅을 향하여 그의 노래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사람은 죽어도 하늘과 땅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노래한다. 신 32:3-4,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모세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유했다. 반석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신 32: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면 그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의 반석이었고, 거기서 나온 물은 생명의 물이었다.

이제 다음 주면 초막절인데, 성전시대 초막절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있었다. 그것은 초막절 마지막 날 성전 앞에서 물을 붓는 의식이었다. 이 날은 ‘호산나 라바, 큰 구원의 날’이라고 부른다. 탈무드에서는 이 행사를 이렇게 묘사한다. “백성들이 성전에 모이고, 대제사장이 두 물 항아리를 들고 성전 앞의 뜰에 있는 바위 위에 선다. 백성들은 옛 광야를 생각하며 ‘목이 마르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며 반석을 쳐다본다. 대제사장이 물을 그 반석 위에 붓는다. 옛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흘러나온 장면을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물이 반석을 타고 흘러내릴 때에 백성들은 환호하며 춤을 추면서 기뻐하고, 초막절 행사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등장하시는 장면이 바로 이 때였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여기서 ‘명절 끝날’이 바로 초막절 마지막 날인 호산나 라바, 큰 구원의 날인 것이다. 바울도 광야 반석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 반석에서 구원의 물을 주셨던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도 반석에서 꿀과 기름을 빨게 하셨다. 밭의 소산인 밀과 포도주를 먹게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의 풍요는 아이러니하게도 풍요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도로 나타났다. 모세는 이런 그들에게 있게 될 앞으로의 현실을 예언적으로 노래한다. 신 32:15,18,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이 누리게 된 풍요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과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욕망을 초래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기고, 다른 기초, 즉 세상이 주는 풍요 위에 자신들의 인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여수룬(ישרון)’은 ‘곧다’란 의미의 ‘야살(ישר)’에서 나온 말이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칭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곧은 자,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배가 부르자 삐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는 그런 그들을 5절에서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라고 표현한다. 반석이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결국 번영이 독이 된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상이 주는 번영을 따라가다 생명의 반석이신 하나님 앞에서 삐뚤어지고 있진 않은가? 한 해의 수확에 감사하는 감사의 절기에 우리는 번영 그 자체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의 반석되신 하나님의 존재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을 독수리에 비유한다. 신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노래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백성으로 훈련하셨다. 물론 그 광야의 훈련은 쉽지 않았다. 아직 날 수 없는데 둥지에서 떨어지는 것은 새끼 독수리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찔하고 감당이 안 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끼 독수리는 추락할 때 비로소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날개짓을 하다가 힘을 얻어 날아 오르게 되는 것이다. 어미 독수리에겐 새끼를 떨어뜨려도 된다는 믿음 있다. 힘없이 떨어지는 자기 새끼를 날개로 받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를 광야로 보낼 때는 다 믿음이 있다. 광야에서 혹독하게 굴리시지만, 결국은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광야를 두려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가지 선택이 있다. 그냥 굴르면서 깨닫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귀 기울일 때 하나님이 깨닫는 마음을 말씀으로 주실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믿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그러면 조금 편히 광야를 통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삶에 광야가 펼쳐질 때, 그것은 나를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광야와 과거의 힘든 시간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희망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나 너무도 쉽게 광야의 하나님을 잊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는 재앙과 포로됨이었다. 모세는 그러한 미래를 예견하듯 이렇게 노래한다.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은 역사상 앗수르, 바벨론, 로마 제국을 일으켜 살찐 여수룬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상의 좋은 것을 따라가다가 물질주의와 우상숭배에 빠져버린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하셨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모세는 이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절대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했다. 모세가 선포했듯,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모세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협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될 때, 그 때 삐뚤어진 길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원과 회복에 대한 소망으로 끝난다.신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분명한 것은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속이라는 사실이다.‘키페르 아드마토 암모(עמו אדמתו כפר)’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여기서 속죄한다는 말 ‘키페르’는 ‘카파르(כפר)’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덮다’라는 뜻이다. 내일이 욤 키푸르인데, 대속죄일은 바로 죄를 덮어주는 날이다. 성전시대 대속죄일에 온 백성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어린 양이 희생제물로 죽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희생제물로 이 땅에 오셨다. 세례 요한은 그를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한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 했을까? 그것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덮을 수는 있어도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히 10:11-12,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하나님의 완전한 속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모세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예견하며 자기 백성을 속죄하실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세 단어로 표현하면 ‘창조, 타락, 구속’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모세의 노래에는 이 세 가지 주제가 다 담겨져 있다. 6절에서 모세는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세우시는 분이다. 신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하나님은 많은 열방 중에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셨다. 그리고 이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이어지게 하셨다. 여기서 분깃이라는 말은 언약 백성이 받게 되는 몫을 말한다. 그런데 그 몫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 몫에 해당하는 책임이 따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복을 받자 타락하고 만다. 번영에 취해 자기를 지으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은 언약에 따른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 중에서 다시 구속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자, 모세는 자신이 부르는 이 노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 31:21,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모세가 부른 이 노래는 하나님의 언약을 대대로 증거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이 노래는 예언이 되었고,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었다. 실제로 이 노래의 예견들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 모세의 노래는 구약시대에서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의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우리들 역시 마음에 담아야 할 노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만드시고, 그 열방이 돌아오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 열방을 축복할 제사장으로 부르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세우신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반석이시다. 우리가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이시다. 모세가 노래한 이 하나님을 우리도 기억한다면, 우리는 광야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광야 한 복판에서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결국 풍요롭고 안정된 삶, 그 자체는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다가 정작 우리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놓치고, 다른 것에 삶의 기초를 놓는다면, 우리는 곧 허물어지고 마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모세의 노래가 우리 마음에 담겨지길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은 너무도 큰 특권이다. 이 특권을 가지고 언약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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