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0월 3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7 영원(Eternity)의 기쁨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3:42-43)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올해는 다른 해와 같지 않은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방문하는 민족대이동이 사라졌다. 이스라엘도 어제부터 초막절인데, 전국적인 봉쇄령으로 이동이 제한되고 있다. 한 해 중 가장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인 이 명절이 긴장과 불안속에서 지나가고 있다. 이번 추석에 화제가 된 노래가 있다. 나훈아의 ‘테스형’이다. 소크라테스를 형이라 부르며 노래하는 가사가 참 인상적이다. 오늘 설교를 통해 다루고 싶은 주제가 이 노랫말 속에 담겨져 있어서 일부를 소개한다. ‘아 테스형 / 아프다 세상이 / 눈물 많은 나에게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 세월은 또 왜 저래 / 먼저 가 본 저 세상 / 어떤 가요 테스형 / 가보니까 천국은 / 있던 가요 테스형’ 가수는 세상이 고통스럽기에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삶이 혼동스러울 때 우리는 철학자가 되는 것 같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싶은 게 지금 우리들의 심정이다. 고통 많은 세상 속에서 내일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싶은 게 우리들의 바램이다. 어떻게 불안과 혼돈속에서도 기쁨으로 살 수 있을까? 오늘은 초막절의 의미를 통해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레 23:42-43,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매해초막절마다 일주일 동안 초막에서 살라고 명령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오늘날까지 잘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일주일이 아니라 40년을 초막에서 살았다.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광야는 힘든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버틸 수 없는 곳이 광야였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펼쳐지는 현실은 메마른 광야뿐이었다. 그들은 지속되는 불안정의 시기를 매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고통스런 광야를 기억하는 초막절을 ‘즈만 심핫테이누(שמחתינו זמן), 우리 기쁨의 절기’라고 부른다. 어째서일까? 왜 그들은 매해 초막절을 지키며 초막 안에서 기뻐해야 할까?

초막이 상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현실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도 그냥 초막 하나 치고 살다가 구름이 이동하면 그것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유대인들만큼 세대에 세대를 거쳐 위기와 불확실성을 많이 경험해 본 민족이 없다. 집을 잃고, 나라를 잃고, 거친 광야로 내몰려본 경험을 이처럼 많이 해 본 민족이 없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파괴된 성전은 곧바로 다시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초막은 파괴되어도 내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초막이 주는 위안이 있다. 초막 속에 고된 몸을 누이며, 초막 지붕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며, 땅의 현실이 아니라 다시 하늘의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초막은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짓는 것이다. 한 자리에 눌러살기 위해 짓는 집이 아니다. 이 초막에서 우리는 이 세상이 본질적으로 나그네길임을 알게 된다. 잠시 텐트치고 지나가는 곳임을 알게 된다.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는 다 ‘나그네’요, ‘본향을 찾는 자’로 살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한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의 사람들의 시선은 이 땅에 있지 않았다. 물론 발은 땅에 디디고 살았지만, 시선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초막에서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집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고 허름한 초막은 믿음의 사람들에겐 ‘영원(eternity)’으로 이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매해 초막절을 지키지만 그들의 시선이 ‘영원’에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초막은 과거에 고생하며 그것을 극복했던 곳으로만 기억해선 안 된다. 미래에 우리가 영원히 거할 장막으로 연결돼야 한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장막 집’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여기선 죽으면 벗고 가게 되는 우리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장막 집’을 헬라어로 ‘스케노스(σκήνους)’로 표현한다. 스케노스는 ‘임시 거주지’라는 뜻이다. 우리 육신은 죽으면 벗어 놓고 가야하는 임시거주지이다.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임시 거주지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이 임시 거주지가 무너지더라도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았다. 이것이 초막 속에서도 영원을 보는 자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초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고후 5:2-4,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그는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자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육신의 장막이 무너졌을 때 벗은 자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처소로 옷 입은 자가 되기를 소망했다. 하늘의 처소로 옷 입은 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사망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음을 믿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사망이 생명을 삼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모두가 죽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사망이 생명에 삼켜지는 것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죽어도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과 부활의 세계를 알게 된 바울은 삶의 목표가 달라진다. 고후 5:9-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사는 날 동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목표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영원한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목표는 지금 이 땅이 아니라 영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것을 목표로 할 때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영원을 목표로 사는 것이 결코 지금 현재의 삶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영원은 현재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봐야 우리는 현재의 상황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살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현재의 확실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용기다. 믿음은 불안정과 위기 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황과 환경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여정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초막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따라 이동하는 삶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초막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에 살아보면서 우리 조상들도 이 초막으로 40년을 버텼는데 나도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초막이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길들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언제 광야가 펼져질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팬데믹이 될지 누구가 상상했겠는가? 불안은 예고없이 우리 삶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우리의 건강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의 직장이 다음 달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언제 코로나 세컨 웨이브가 올 지 모르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이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제 1~2년 뒤에는 대기업도 살아남기 위해 거대한 구조조정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인생 장막에 사는 우리는 아무도 위기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때 초막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상황이 불확실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비록 우리 삶에 광야가 펼쳐진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지점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이처럼 초막 속에서 내일의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이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지켜내는 비결인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큰 집을 갖고, 안정된 직업을 갖기 원한다. 불안한 내일을 맞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큰 집과 안정된 수입을 확보할 때까지 지금 현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정신 없이 산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안전한 장막을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케 했다. 위기와 불확실성은 예고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이스라엘은 하루 코로나 확진자 수가 9000명을 넘어섰다. 우리는 지금 통제를 잃었다는 두려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현실 때문에 이전에 누리던 일상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안전은 안전한 집과 안정된 직장에 있지 않다. 우리의 희망은 육신의 장막 속에서도 우리와 여전히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은 초막속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가득한 이 때에도 우리는 오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우리가 쌓아 놓은 육신의 장막이 흔들리다 해도, 우리에겐 영원한 하늘의 처소가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테스형’의 가수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그러나 내세에 소망이 있는 자는 비록 오늘이 힘들어도 천국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그네와 같은 삶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가수는 또 이런 질문을 한다.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형’ 그러나 이 질문은 자기 자신도 몰랐던 소크라테스에게 물어볼 질문이 아니다. 하늘의 처소를 확신했던 바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인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했다. “초막절은 불안정(insecurity)의 축제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더 크고 강한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되는 용기 때문에 공격 당하기에, 그들이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축제입니다. ‘믿음의 그늘 아래’에서 초막에 앉아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안전의 전부입니다.” 이처럼 초막절은 안정속에서 기뻐하는 절기가 아니다. 불안정한 환경속에서도 믿음으로 기뻐하는 것을 선택하는 절기인 것이다.
초막절에 유대인들이 초막 속에서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힘들게 했던 환경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초막에서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 안에 있다가도 구름과 불기둥이 성막 위에서 떠오르면 초막을 거둬 이동했다. 그들이 만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임재였다.그래서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그 영광과 임재를 초막절을 통해 계속 누릴 수 있기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과 임재가 오늘 육신의 장막 속에 사는 우리에게도 일상적인 체험이 되길 원하신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처럼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영원한 것에 이어지길 원하신다. 그 영원(eternity)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now)의 삶을 기뻐할 수 있다. 많은 것을 쌓아 놓고도 정작 하나님의 영원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영원의 기쁨을 현재의 삶에서 누릴 수 없게 된다. 바라기는 이 영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의 현재를 불안함 대신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