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0월 10일 설교 이익환 목사
토라포션 48 뒤바뀐 운명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신 33:8)
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장남과 장녀로, 어떤 사람은 막내로, 어떤 사람은 그 사이에 끼인 채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은 집의 자녀로 금수저를 문 채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의 자녀로 흙수저를 문 채 태어난다. 그리고 각각 존재의 부르심 앞에 선다. 장남은 가문을 이어가는 부르심이 있다. 알콜중독과 폭력가정의 장녀는 집안의 평화를 중재해야 할 부르심이 있다. 부모의 사업이 망한 가정의 자녀는 쓰러진 가운을 일으켜야 하는 부르심이 있다. 타고난 환경을 마주해야 하는 게 사람의 운명이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가 가나안 진입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을 축복하는데, 그들의 운명과 존재의 부르심에 맞게 예언적으로 축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축복에서 시므온 지파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특이점은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과 비교해 보았을 때 레위지파에 대한 축복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면서 오늘 우리의 운명을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
이스라엘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을 살펴보기 전에 시간을 거슬러 야곱의 축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곱은 죽기 전 그의 자녀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을 남긴다. 그런데 둘째와 세째인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남긴다. 창 49: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폭력의 도구’라고 비유한다. 히브리어로는 ‘켈레 하마스(חמס כלי)’인데, 개역한글은 ‘잔해하는 기계’라고 번역했다. 야곱은 왜 그리 화가 난 것일까? 그래도 죽어가는 마당에 축복의 말을 남겨주면 안되었을까?
이들이 잔해하는 기계로 불리게 된 사건이 있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와 세겜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여자들을 보러 산책을 나갔다가 세겜성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일로 분노한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성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그것이 아물기 전에 칼로 그들을 다 죽여버린다. 이것은 아버지 야곱으로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임종 전 이 둘을 묶어서 저주의 말을 남긴 것이다. ‘폭력의 도구’라는 아버지의 운명적 선언을 들은 이 둘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먼저 시므온의 운명이다. 시므온 지파는 오늘 본문인 신명기 33장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모세가 빠뜨렸기 때문이다. 모세는 왜 다른 열 한 지파는 다 축복을 하면서 시므온 지파는 빠뜨렸을까? 이것은 모압에서 있었던 바알브올 사건과 관련이 있다. 민 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기서 ‘음행’은 이방신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바알브올에 가담하는 우상숭배에 음행이 따랐던 것이다. 이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하여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변질시켜 갔다. 하나님은 공동체에서 이 음행을 제거하기 위해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를 죽이라는 조치를 내리신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한 사건이 벌어진다. 시므리라는 사람이 고스비라는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음행하기 위해 막사로 들어간 것이다. 음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 나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본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진노한다. 그는 막사로 들어가 이 두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러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서 그치게 된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이만 사천 명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은 시므리의 배경을 밝힌다. 그는 바로 시므온 지파의 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이 일 이후 이스라엘은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출애굽 이후 인구조사에서 시므온 지파는 59300명이었다. 지파 중 세번째로 많은 인구였다. 그런데 염병 후에 실시한 인구 조사에서 시므온 지파는 22000명이었다. 37100명이 줄은 숫자다. 아마도 염병으로 죽은 대부분이 시므온 지파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비느하스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라졌을지 모른다. 시므온 지파는 이처럼 바알브올 숭배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뜨렸던 지파였던 것이다. 가나안 입성을 거의 앞 둔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라 모세의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예상된다. 이런 연유로 시므온 지파는 모세의 축복에서 제외된다. 이 후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따로 땅을 분배 받지 못한다. 그들은 유다 지파 안의 도시에 빌붙어 살다가 결국 흩어지게 된다. 야곱의 유언대로 그들은 이스라엘 중에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와는 대비되어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비느하스는 바로 레위 지파였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인 그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민 25:12-13,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질투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속죄했던 레위지파에게 대대로 제사장 직분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바알브올 사건을 통해 시므온 지파와 레위 지파의 운명은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자 그러면 모세가 언급한 레위 지파의 축복을 보자. 신 33:8,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모세는 레위를 ‘경건한 자’로 부른다. 아버지 야곱을 통해 ‘폭력의 도구, 잔해하는 기계’라고 불리웠던 것과는 너무도 상반된 표현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하거나 뜻을 물을 때 사용하던 물건이다. 레위 지파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폭력의 도구’라는 아버지의 저주를 받고서 비관하며 살지 않았다. 그들은 한 때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서 일평생 저주 받은 자의 정체성을 가진 채 절망하며 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질투 때문에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하나님의 도구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 것이다.
모세의 축복은 이어진다. 신 33:9,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이것은 광야 시절 금송아지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진중에서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 한마디로 모세를 빡치게 한 사건이었다.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한다. 이 때 나아간 사람들이 바로 레위 지파였다.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가담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출 32:27,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레위 자손은 이 엄위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에 옮긴다. 그들은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이든, 형제이든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처단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모세가 말했다. 출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 레위 지파에게 내리신 복이 뭘까? 그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키는데 헌신되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신 33:10,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레위 지파 역시 시므온 지파처럼 따로 땅을 분배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 흩어져 살면서 이스라엘 온 백성을 대상으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다. 야곱이 레위를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예언했을 때 이것은 저주에 가까웠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키는데 헌신하였기에 그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레위 지파를 향한 축복의 마지막 내용이다. 신 33:11,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레위인들은 따로 기업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의 유산이 되었다. 모세는 그러한 그들을 위해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라고 축복한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그를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꺽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하는 자를 책임지고 지키시며 돌보아 주시도록 기도한 것이다.
오늘 레위 자손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누군가의 저주 선언은 우리가 평생 달고 살아야 할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타고난 기질과 환경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 짓는 굴레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를 따를 제자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당시 유대사회에서 천대받던 갈릴리로 가셨다. 흙수저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가서 흙수저들을 부르셨다. 그 중엔 어부도 있었고 죄인 취급 받던 세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따랐던 갈릴리 사람들은 더이상 그들의 운명과 환경에 지배받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들의 운명은 바뀐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는 사명자로 세워진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갈릴리의 한 산에 올라 제자들을 축복하며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하셨다.여기서 권세의 위임이 이루어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이 권세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권세는 헬라어로 ‘엑수시아(εξουσια)’다. ‘엑스(εκ)’와 ‘우시아(ουσια)’가 결합된 말이다. 엑스는 ‘무엇으로부터, out of’란 뜻이고, 우시아는 본질이라는 뜻이다. 권세는 본질로부터 나오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권세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권세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다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 이 권세, 엑수시아를 받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이다. 요한복음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때 우리의 출신, 환경, 운명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존재의 부르심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권세를 사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존재의 부르심을 이루며 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굴레에 묶여 산다. 출신과 환경과 원가족의 영향 아래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 저주스런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많은 사람들이 씨름하며 산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시대와 상황이라는 굴레에 묶여 산다. 그 굴레들은 우리의 인생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둠의 굴레를 뚫고 빛으로 오셨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의 굴레를 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획하신 존재적 부르심이 있다. 이 부르심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 존재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때, 비로소 그 부르심을 완성하는 길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중에는 장남, 장녀로 태어나 다른 형제들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중에는 부모의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고 절망하며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레위 지파는 과거의 실수와 저주를 안고 평생을 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충성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바꾸었고 그들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흙수저 출신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하며 사람 낚는 어부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았다. 그들 각자가 힘든 운명을 부여받고 태어났지만 그들은 말씀과 언약 속에서 그들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 존재의 부르심이 확인되어야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세상을 향한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로 모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코로나가 우리의 삶을 방해할 수 있지만, 우리의 존재의 부르심을 묶을 수는 없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이 지금 인류의 운명이려니 하며 넋놓고 살아선 안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교회와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구해야 한다.
어제 초막절이 끝났고 오늘은 심핫토라다. 심핫토라는 ‘토라의 기쁨’이란 뜻이다. 일년간 읽었던 토라포션을 끝내면서 책걸이 하는 날이다. 우리도 지난 일년간 토라포션을 따라 설교 말씀을 나누었다. 함께 책걸이를 하고 싶은데 모일 수 없어 안타깝다. 다음 주부터는 신약 성경을 구약과 유대 관점으로 살펴보는 신약포션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려 한다. 말씀 안에 우리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는 비밀이 담겨 있다. 이 사실을 믿는가? 바라기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타고난 운명을 바꾸고, 환경을 뛰어 넘어 우리 존재의 부르심을 완성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