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0월 1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 혼돈과 질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혼돈스러운 시대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개인과 기업과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사회 환경을 요즘 ‘뷰카(VUCA)’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변덕스럽고(Volatile), 불확실하며(Uncertain), 복잡하고(Complex), 모호(Ambiguous)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불안하다보니 요즘 리더십 분야에서 ‘심리적 안전감’이란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불안이 높아지면 몸도 지치고 판단도 흐려지고 일의 능률도 떨어진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결코 좋은 성과를 낼 수가 없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Amy C. Edmondson 교수는 구글에서 2년 동안 높은 성과를 낸 팀의 비밀을 연구했다. 그 비밀이 뭘까? 바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었다. 높은 성과를 낸 팀에만 있는 요소를 찾아보니 그 팀에는 ‘심리적 안전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심리적 안전감’은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여기는 괜찮아’라고 느끼는 것이다. 조직구성원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리더가 불안을 흡수해야 한다고 에드먼슨 교수는 말한다. 실제로 구글에서는 실패한 팀에게 보너스를 준다고 한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심리적 안전감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팀의 구성원이 위축되어 아무 시도도 하지 않고 역량을 낭비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문제를 제기하며 안전한 실패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큰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그들은 판단한 것이다. 불안한 시대에 혼돈을 질서로 바꾸어 나가는 리더가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오늘부터 우리는 신약성경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은 요한복음 말씀을 통하여 혼돈스런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갈릴리 호수 근처 벳세다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는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태초’라는 시점으로 초대한다. 태초가 언제일까? 태초는 창조가 일어나기 이전의 시간이다. 요한복음을 읽었던 많은 유대인들이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말에서 창세기 1장 1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토라가 베레쉬트(בראשית), 즉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창조 이전의 우주는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תוהו ובוהו)’이다. ‘토후’는 ‘혼돈, 빈 장소, 불모의 광야’라는 뜻이다. ‘보후’는 ‘공허, 폐허’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이처럼 ‘혼돈과 공허’라는 창조의 긴장이 있었던 태초의 시점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왜 태초에 땅에는 혼돈과 공허가 있었을까? 혹자는 그것이 루시퍼의 반역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성경에서 그것을 입증할만한 명확한 구절은 없지만 나름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째튼 ‘토후 바보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 이전의 상태였다. 계속해서 요한은 증언한다. 요 1:3-4,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은 모든 만물의 창조가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신다. 창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것이 창조 첫째 날의 사역이었다.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본질은 경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빛이 창조되면서 낮과 밤의 경계가 생겼다. 궁창이 만들어지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생겼다. 이제 혼돈과 공허로 가득했던 땅에 창조의 질서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창조 여섯 째 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여 사람을 만드셨다. 그들은 결혼하여 생명을 낳으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땅 위에 세워가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진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하신 말씀은 ‘토브 메오드(מאד טוב),’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창조 이전의 ‘토후 바보후’는 창조를 통하여 ‘토브 메오드’로 바뀌었다. 창조 이전의 공허와 혼돈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질서와 생명의 시작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혼돈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했던 에덴에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라는 경계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그 경계를 무너뜨렸을 때 그들은 낙원을 상실했다. 땅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며 다시 혼돈과 공허가 시작됐다. 하나님은 그렇게 혼돈이 다시 시작된 세상에 연민을 느끼셨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셨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가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 갈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게 노아였고, 아브라함이었고, 모세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이 세우신 경계를 지키도록 하셨다. 레 10: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여기서 ‘분별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레하브딜(להבדיל)’이다. 제사장의 사명은 한마디로 구별하는 것이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무엇인지,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들이 무엇인지 구별하며,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를 이 세상에 세워나가도록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명에 실패하고 만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슬픔을 이렇게 탄식한다. 렘 4:19, 22-23,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토후 바보후’란 단어가 나온다. 예레미야는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도다, 히네 토후 바보후(ובהו תהו הנה)’라고 탄식했다. 그는 땅이 혼돈과 공허로 가득하고 하늘은 빛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유대사회가 타락하여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 상태로 돌아갔다고 탄식한 것이다. 하나님 대신 세상과 우상에 무릎 꿇을 때 반복되는 것이 바로 ‘토후 바보후,’ 혼돈과 공허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연민을 느끼셨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셨다. 그래서 ‘토후 바보후’인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직접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고하셨다. 사 60:2-3,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그리하여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은 때가 차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한은 그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포한다.요 1:5, 9-11,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자,세상은 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사람들은 자기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까?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요 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그렇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둠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어둠이라는 혼돈을 끝내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렇게 도전한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그 분을 당신의 삶에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빛으로 오신 그 분의 광명 앞으로 나아오라는 것이다. 태초에 혼돈으로 가득했던 땅에 말씀이 선포되면서 혼돈의 역사가 끝난 것처럼 우리 삶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들어와야 우리 인생의 혼돈이 끝나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이다. 새 창조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런 자신의 간증을 했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바울의 간증처럼 영적 소경상태에서 눈을 뜨게 된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모든 혼돈을 끝내는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단지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모든 생명의 창조주요 구원자시다. 바울도 동일한 사실을 이렇게 증거한다. 골 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우리는 이 아들을 통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이 아들을 통해 죄로 인한 혼돈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 요한은 그 사실을 이렇게 요약한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은 우리와 장막을 같이 하신다는 뜻이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분은 우리 인생 장막에 오시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거주하며 우리 인생의 혼돈을 끝내시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것이다.
2019년 말 이 땅에는 Corvid-19이라는 엄청난 혼돈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혼돈은 코로나 바이러스만이 아니다. 코로나 이전부터 세상은 혼돈에 시달렸다. 우리를 혼돈스럽게 했던 것, 간단히 세 가지만 짚어보겠다. 첫째는 야수자본주의라는 혼돈이다. 독일 경제학자들은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야수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자본주의의 고삐가 풀려 사람들을 잡아먹는 야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세계 경제는 글로벌화되었다. 공동체는 약화되고 세상은 무한 경쟁의 정글로 변했다. 김누리 교수는 한국 사회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야수자본주의가 활개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실업, 불평등, 자살률, 노동시간, 산업재해율을 보이는 건, 바로 자본주의의 야수성이 한국사회에서 관철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본이 우상이 된 사회에서 인간이 소외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면 혼돈이 오는 것이다.
두번째 혼돈은 인본주의의 혼돈이다. 지금 21대 국회에서는 정의당의 상정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다시 발의되었다. 이것이 입법이 되면 동성애와 동성혼이 합법화된다. 이 법이 통과되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징역이나 벌금형으로 역차별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셨고, 결혼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질서를 세우셨다. 이 질서를 허문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가족제도가 무너지는 혼돈이 오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인류의 역사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를 위한다는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배제하고 행사된다면 남는 것은 혼돈과 갈등뿐인 것이다.
세번째 혼돈은 과학기술만능주의의 혼돈이다. 이젠 유전자 편집기술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다. 인공지능개발을 통해 사람이 오히려 노동에서 소외되는 시대를 만들고 있다. 기술 발전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추진되는 것이라면 인류에게 혼돈과 불안만 안겨주게 될 것이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욕망이 우상이 될 때 인류는 혼돈과 공허라는 ‘토후 바보후’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이 ‘토후 바보후’의 역사를 끝내는 길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창조의 역사는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빛이 임했을 때 만물의 경계가 드러나며 질서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창조 마지막 날 인간은 그 질서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괜히 태어난 게 아니다.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가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질서를 세울 수 있는 기준은 세상 철학이나, 이념이나, 인본주의가 아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구별하고, 그것을 이 시대 사람들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탄은 계속해서 인류를 혼돈과 흑암가운데 가두려 할 것이다. 사탄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선악과를 인류의 입에 넣어주려 할 것이다. 사탄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 밖의 것을 욕망하게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는 에덴을 상실하고 ‘토후 바보후’라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한 장막 안에 사는 것보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처럼 우상이 침투한 우리 일상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지길 소망한다. 말씀의 빛이 비춰짐으로 사물의 경계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세워지길 바란다. 우리 영혼에도 이 불안한 시대를 뚫고 주님의 빛이 임하길 소망한다. 빛이 비춰지지 않는 영혼의 주소는 어두움일 뿐이다. 오직 우리 영혼이 빛 되신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빛 되신 예수님만 따르길 소망한다. 주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질 때 우리 영혼의 혼돈이 끝난다. ‘토후 바보후’가 끝나고, ‘토브 메오드’, ‘매우 좋았더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심리적 안전감을 누리게 된다. 다른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화가 임해야 우리는 심리적인 안전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환경과 상관없이 나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혼돈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가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