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0월 2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 일상의 소멸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17:26)
이스라엘에서 최장수였던 할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 올해 117세의 슐로모 슐레이만(Shlomo Sulayman)이라는 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그분은 혼자서 산책도 다니고 동네 회당에 기도하러도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집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것이다. 좀 더 누릴 수 있었던 그 분의 일상이 코로나로 인해 소멸된 것이다. 코로나가 없던 2019년 같은 일상을 맞기 위해서는 앞으로 5년이 걸린다는 예측이 있다. 이전에 우리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지루하게 여겼던 일상이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우리 모두는 그리워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는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라는 말이 나온다. 이 때의 사람들의 일상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일상에서 로마의 식민 통치라는 억압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이 원하는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시아가 오셔서 회복하실 나라는 자신들과 같은 의인들이 부활을 경험하며 결코 소멸을 겪지 않는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니이까?”(눅 17:20) 그들의 관심은 ‘언제’였다. 이에 예수님이 답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때’를 묻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지 먼저 그 ‘실체’를 알려주셨다. 이미 이 답변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그들에게 전했다. ‘하나님 나라는 힘있는 지상의 제국처럼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너의 가운데 와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때’에 대한 답변을 해주신다. 눅 17: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날 하루’는 언제일까?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다.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의 나라를 세우시는 날이다. 이 때 인자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일상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의 일상은 영원히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자가 다시 오시는 때에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할 것인지 말씀하셨다. 눅 17:26-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다. 사실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노아의 때 사람들의 일상이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일상만을 위해서 살았다는데 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상만을 위해 살 때 부패와 타락이 온다. 성경은 노아의 때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창 6:11-12,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이다. 아담 이후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사라진 열 번의 세대가 지나갔다. 노아의 때 사람들의 일상은 포악함과 부패로 가득했다. 일상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면서 그들의 일상은 타락하고 만 것이다.
포악함과 부패로 가득했던 세상에서 노아는 자신을 지킨 사람으로 소개된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의인,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노아에 대한 수식이 화려한다. 성경에서 이렇게 화려한 평가를 받은 인물이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노아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11세기 유명한 성경주석가 라쉬는 “노아가 그의 당대에 의인이었을지 모르나 그가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다면 그의 가치는 별 볼 일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아브라함은 소돔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듣고 그들을 위해 탄원했다. 그는 그 성에서 의인 열 명을 찾아도 멸하시겠냐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러나 노아는 온 인류를 물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듣고도 사람들을 대신해서 중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랍비 중에는 노아가 의인이었을지는 모르나 다른 사람을 이끄는 리더는 아니라고 박하게 평가한다. 노아는 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탄원하지 않았을까?
신약성경에서 노아에 대한 평가는 이러하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물로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은 너무도 엄위하셨다. 세상은 너무도 악했고,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확고히 작정되었다. 노아는 다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옮겼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묵묵히 방주를 짓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 메세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봤을 것이다. ‘도대체 뭐 하냐’고. 그가 대답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노아의 망치소리를 통해 온 세상에 울려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워낙 포악하고 부패했다. 그래서 그의 메세지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상속했던 사람들이 나온다. 노아의 증조 할아버지 에녹도 그런 사람이다. 에녹에 대한 기록을 보자. 창 5:21-24,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는다. 므두셀라는 ‘무트(מות)’와 ‘셀라흐(שלח)’가 결합된 말이다. 무트는 ‘죽음’이고, 셀라흐는 ‘보내다’라는 뜻이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것을 ‘그가 죽으면 홍수를 보낸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것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아들의 이름이 그래서인지 에녹은 아들을 낳은 후 경각심을 갖고 산 것으로 보인다. ‘얘가 죽으면 하나님이 홍수를 보내실거야’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정신이 버쩍 났을 것이다. 에녹은 이러한 심판을 염두에 두며 삼백 년을 하나님과 긴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 가신 최초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의 일상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곧바로 천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일어났다. 여기에 나온 숫자 187, 182, 600을 더하면 969년이 나온다. 므드셀라가 969세에 죽었으니까 그의 이름처럼 그가 죽고 나자 바로 그 해, 세상에 홍수가 보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에녹 때부터 이미 심판에 대한 계시가 세상에 주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에녹 역시 이 심판에 대한 메세지를 가지고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로 살았던 것이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천 년 가까운 시간을 심판에 대한 준비없이 자신의 일상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유다서에는 에녹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유 1:14-16,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에녹 당대 사람들의 일상은 경건하지 않았다. 원망과 불만과 정욕으로 가득했고, 또한 자랑과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것으로 가득했다. 물론 에녹 역시 먹고 마시고 장가갔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에녹은 그런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더 크신 뜻을 늘 염두에 두며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외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 에녹의 삶을 신약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 천국으로 옮겨지기 전 그의 일상의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던 것이다.
다시 누가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눅 17: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인자가 다시 오시는 날도 노아의 때와 같다는 것이다. 갑자기 그 날이 임한다는 것이다. 인자가 다시 오신다는 선언은 이미 이천 년 전, 모든 인류에게 주어졌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인자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지는 축복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일상이 영원히 소멸되는 심판의 날인 것이다.
지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심판의 메세지와 상관 없이 사는 것 같다. 그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의 일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간다. 이런 시대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그러나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어쩌면 평생을 에녹처럼, 노아처럼 세상의 조롱과 싸우며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인자의 날’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소중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뜻,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직장 때려치고 풀타임 선교사가 되라는 말인가? 교회 일과 집안 일 중 교회 일을 먼저하라는 말씀인가? 아니다.이 말씀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의 맥락 속에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염려하며 돈에 매여 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먹고 사는 일상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정의를 위해 목숨 걸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현장은 교회 안 만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다. 내가 지금 있는 가정, 직장, 학교, 교회가 하나님의 더 높은 뜻을 구하고 적용하는 현장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염려로 하나님의 더 큰 뜻을 붙잡지 못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내일에 대한 염려로 인해 삶의 크기를 축소시키는 유혹에 휘둘린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헌신하기 보단 좀더 안정적인 직장 생활과 좀더 자녀를 세상에 뒤쳐지지 않도록 가르치는데 온통 마음을 빼앗기며 산다.
에덴에서 사탄의 유혹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보다 너 자신에게 더 만족을 주는 세상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이게끔 유혹했다.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하고, 나를 지혜롭게 할만한 것으로 보이게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이다. 그 속임에 굴복하는 사람은 일상과 내일의 염려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로 한번 타락한 세상은 반드시 구속이 필요하다. 죄에서 구속을 경험할 때 우리의 일상은 회복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롬 8:19-21,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우리는 온 창조 세계 피조물의 구속과 회복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피조물의 구속을 위해 이미 이 땅에 임했다. 우리는 일상이라는 우리의 왕국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더 높은 부르심,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인 것이다. 세상은 지금 탄식하며, 자신들을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이끌어 줄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나타나길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이냐고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와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9:23-24,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나님 나라는 역설적이다. 자기 목숨을 위해서만 살면 잃어버리지만, 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때 얻게 되는 게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다. 내 일상을 그분께 내어 드리며, 주님과 동행할 때 나의 일상은 하나님 나라의 크기로 확장되는 것이다.
과거 몇 세대 위의 세대와 비교했을 때, 지금 우리 세대는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모른다. 우리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들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모른다. 노아의 때 사람들의 일상은 결국 소멸되었다. 사실 그들은 물로 인한 심판 이전에 이미 포악함과 부패로 일상의 소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인자의 날에 우리의 소멸된 일상은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하나님 나라의 일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물 심판으로 소멸되었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저 소소한 일상을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개의치 않았고, 하나님 나라, 그의 의라는 더 높은 부르심을 위해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부패하고 포악한 세대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돼야 한다. 그런 사람은 장차 다가올 ‘인자의 날’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 ‘인자의 날’이 속히 오길 기대한다. 바라기는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인자의 날이 오길 준비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일상의 소멸이 아니라 일상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