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1월 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4 사랑의 결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림 하나를 보겠다. 샤갈의 ‘이삭의 희생’이란 작품이다. 샤갈은 유대인이다. 그의 나이 80세에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먼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다. 대략 기원전 2000년 경에 있었던 일이다. 두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이다. 이삭 사건이 있은 지 2000년 뒤에 있었던 일이다. 세번째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고통 당하는 장면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2000년 뒤에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이 작품에는 4000년이란 시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담겨져 있다. 그림 왼쪽에는 희생당하는 이삭을 보고 놀라는 사라와 하나님이 예비하신 어린 양이 그려져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 상단에는 두 천사가 그려져 있다. 푸른색의 천사는 다급히 아브라함을 말리고 있다. 흰색의 천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과 아우슈비츠에서 고통받는 유대인들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걸까? 오늘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으로 이 그림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 그림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창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 나무에 결박한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아케다(עקדה)’라고 표현한다. ‘아케다’는 ‘결박하다’는 동사 ‘아카드’의 명사형으로 ‘the binding, 결박’이라는 뜻이다. 그냥 아무 것이나 묶는 것이 아니라 ‘제사로 드려지기 위해 묶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묶인 그것과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곧 희생제물로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아버지의 손에 순순히 결박 당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랍비들의 글을 보면 이삭은 자신이 희생될 것을 미리 알았지만 기꺼이 아버지의 손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심지어 이삭은 자신의 손을 묶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자신이 무심결에 저항하며 칼을 멈추게 할 수 없도록 자신을 결박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창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 이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갔다고 표현한다. ‘함께’는 히브리어로 ‘야하드(יחד)’다. ‘같은 뜻으로’란 의미가 있다. 이삭은 제단 나무 위에 몸만 묶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함께 결박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약속으로 얻은 소중한 자손이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이 이삭 한 사람에게 달려있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언약도 불타 없어지게 된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그의 미래의 축복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하셨을까? 그리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겠다는 뜻을 정할 수 있었을까?
창세기 3장에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뱀에게 하신 말씀이다.인류에게 주어진 저주를 역전시킬 ‘여자의 후손”’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여기서 후손은 히브리어로 ‘제라(זרע)’다. ‘씨’라는 뜻이다.아브라함 역시 셈의 계보를 잇는 자였기에 그의 씨를 통해 하와의 후손이 이어지고, 결국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자손이 나타날 것을 그는 믿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 때 계시를 통해 예수님의 때를 보았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이삭의 목숨이 아니었다. 이삭에 대한 소유권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소유권마저 포기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여주기 원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여자의 후손이 오기까지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동의하며 믿음으로 순종할 동역자들이 필요하셨다. 아브라함은 또 한 차례 믿음의 도약이 필요했다. 이삭을 갖기 전 그는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로는 더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근거가 더이상 자신들로부터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기적처럼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되었다. 이삭을 갖게 된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이끌기 원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라”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그 영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결박하며 자신의 욕심, 자신의 자아, 그리고 모든 의심과 두려움까지 결박해야 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야 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런 독백을 하셨을 것만 같다. “아들을 나무 위에 묶는 너의 심정이 어떠니? 그것은 장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하게 될 일이란다”
히브리서는 이후의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히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죽은 태를 열고 생명을 주셨던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의 믿음의 습관은 더 큰 믿음으로 확장된다.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할 때, ‘인간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험에도 뜻이 있을거야’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다. 믿음과 순종의 사람만이 세상의 상식을 뒤엎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이 땅에서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창 22:16-18,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결박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을 주신다.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성취된다.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희생제물이 되야 했던 예수님의 완벽한 표상이었다. 둘 다 독자였다. 둘 다 기적적으로 탄생했다. 둘 다 자신이 묶이게 될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에 올랐다. 둘 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제물로 결박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다. 죽음의 잔을 마시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맺었다. 예수님은 결국 죽는다는 두려움에 자신을 결박시킨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뜻에 자신을 결박시킨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순종 이후의 결과를 이렇게 묘사한다. 빌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결박한 예수님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다. 그리고 그의 희생의 피를 통해 온 인류가 죄사함을 얻고 생명을 얻는 길을 여셨다.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결박하셔야 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독생자였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우리는 결국 이삭의 결박, 이삭의 아케다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케다의 궁극적 메세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된 씨의 결박과 희생을 통해 인류에게 구원과 생명이 왔다는 것이다. 약속된 씨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가 깨졌다는 것이다. 약속된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어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를 믿을 때 의롭게 되는 것이다.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삭이 결박되었던 곳은 모리아산이었다. ‘모리아(מריה)’는 ‘보다’라는 뜻의 ‘라아(ראה)’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여호와께 보여지다’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 후 모리아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יראה יהוה)’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보신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모리아 땅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순히 결박 당하는 이삭의 순종을 보셨다. 이후 이 모리아 땅에는 성전이 세워진다. 그리고 같은 모리아 산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결박 당한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된다는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인류는 이 모리아산에서 인류를 위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이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미리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길을 잃은 곳에서 피할 길을 보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가 죽을 것 같은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의 절망의 밤도 지켜보셨다. 바벨탑을 내려다보고 계셨던 하나님, 이삭의 결박을 보셨던 하나님, 그리고 아들의 결박을 보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스런 현재와 불안한 미래도 미리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도 변함없다. 하나님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는 동역자를 찾으신다.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의 관심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의 삶을 십자가에 결박시킨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께 자신의 삶을 묶어버린 것이다. 그 분과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묶여 있는가? 내일에 대한 염려에 묶여 있는가? 자녀에 대한 근심에 묶여 있는가? 돈과 일에 대한 걱정에 묶여 있는가? 우리가 묶여 있는 대상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끌려가게 된다. 우리는 그 결박을 풀어내야 한다. 그 결박을 풀고 먼저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뜻에 나를 묶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랑은 히브리어로 ‘아하바(אהבה)’다. 성경에서 이 ‘아하바’라는 단어는 창세기 22장 이삭의 결박 사건에서 처음 등장한다. 아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아하바’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걸어보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겠는가?
오늘 살펴보고자 했던 샤갈의 그림에 대한 분석은 사실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눈 말씀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다시 한번 본다면 이 그림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이삭의 결박, 예수님의 결박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순전히 따른 사랑의 결박인 것이다. 그 순종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의 역사를 가능케 했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사탄은 이 땅에서 우리를 죽음으로 위협하며 두려움으로 묶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생명을 드러내셨다. 바라기는 오직 이 사랑에 매어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즐거이 따르는 주의 백성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