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1월 14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5 언약의 계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 1:1,17)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께 유창이가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가 유대인 친구들과 기독교에 대해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이미 어려서부터 유대교의 가르침으로 생각이 굳어진 친구들, 그것도 여러 명을 혼자 상대하려니 힘이 부쳤던 모양이다. 아쉬움을 토해 놓는 유창이를 보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이 시작된 것 같아 반갑기도 하고, 그 싸움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함께 긴장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유대인인 마태도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대상이 바로 동족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한다. 누가 누구를 ‘낳고’ 라는 말이 40번 이어진다. 우리에게는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조상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태는 특히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열었던 다윗왕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하여 그들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강조한다. 예수를 기독교의 신으로 알았던 유대인들 중에는 이 족보를 보고 회심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우리 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설교를 준비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신 분인지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유대인들에게 ‘계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톨돗(תוֹלְדוֹת)’이라는 말이다.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기서 내력이란 말이 ‘톨돗(תוֹלְדוֹת)’이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시작에 관한 소개다. 계보란 뜻의 톨돗은 천지 창조와 함께 인간 창조를 소개할 때도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마태가 ‘계보(게네세오스, γενέσεως)’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중요한 시작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단어였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계보에 관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할 때 특히 다윗을 기준으로 내세웠다.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왜 마태는 ‘열네 대’라는 사실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히브리어로 다윗은 ‘다비드(דוד)’다. 히브리 알파벳에는 숫자값이 있는데, 달렛(ד)은 네번째 알파벳이라 4, 바브(ו)는 여섯번째 알파벳이라 6이라는 숫자값이 있다. 따라서 다비드에 해당하는 숫자값 4,6,4를 더하면 14가 된다.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14라는 다윗의 숫자값을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기억하기 쉽게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이 계보를 이어주는 핵심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다윗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언약에 따라 약속된 자녀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자 그럼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살펴보자.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내가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겠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이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언약은 히브리어로 브리트(ברית)이다. ‘자르다’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 짐승의 자른 고기 사이를 언약의 당사자들이 지나간다. 언약을 깨뜨리면 잘린 짐승처럼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목숨을 건 맹세가 바로 언약이었다. 이 때 하나님은 횃불의 형상으로 아브라함이 잘라 놓은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 스스로 목숨을 걸고 맹세한 약속이었다. 하나님은 이후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신다.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 자손(제라)과 땅(에레츠)이었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제목은 ‘사라의 인생, 사라의 삶’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사라가 127세를 살고 죽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너무도 슬픈 사건이었다.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살았던 평생의 반려자가 죽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나안에는 그의 소유인 한 평의 땅도 없었다. 언약을 이어갈 아들 이삭이 있었지만, 그는 서른 일곱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언약 두가지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그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그를 통해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 홀로 다시 믿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사라의 인생’이라는 토라포션에는 아브라함이 ‘땅’과 ‘씨’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행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사라를 묻어줄 땅을 위해 비싼 값을 주고 땅을 구입하는 장면이다. 또 하나는 이삭을 위한 아내를 찾기 위해 그의 종을 하란으로 보내는 장면이다. 그 결과 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작은 한 뼘의 땅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언약을 이어갈 아들 이삭의 결혼을 보게 된다. 그 후 아브라함은 175세에 편안하고 만족한 죽음을 맞이한다. 약속의 전부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약속의 씨앗이 시작되고 자라가는 것을 보며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아브라함의 언약은 그의 14대 뒤인 다윗에게 이어졌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 컸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갈망을 이렇게 노래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짓기 원하며 그 소원을 나단 선지자에게 알린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마음을 기뻐하셨다. 그리하여 나단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언약을 다윗에게 주신다. 삼하 7:6,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아니다. 삼하 7:11-13,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이것이 다윗 언약의 내용이다. 후손(제라)과 왕위(키쎄)에 대한 약속이다. 자 그런데 다윗의 몸에서 난 씨 솔로몬이 죽자마자 그의 나라는 두 쪽이 나고 만다.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흔들리고 만다. 결국 다윗의 14대 뒤인 여고냐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다. 다윗 언약은 바로 후대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다윗 왕조는 몰락했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백성들은 견고한 왕위 대신 고달픈 바벨론 포로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의 때까지 열 네 대 동안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플랜 B를 시작하셨다. 그것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새 언약의 시대가 올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됨을 예언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언약은 솔로몬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한 의로운 가지,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는 것이었다. 그가 오셔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런 예언의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다윗왕 같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전에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의 시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렘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의 때까지 열 네 대의 기간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사라진 듯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포로기간에도 이처럼 예고 되었고, 날이 이르러 새 언약으로 찾아왔다.
예수님이 새 언약을 이루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새 언약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다. 예수님은 언약이 무엇인지 아셨다. 그것은 언약이 깨졌을 때 조깨진 고기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신 그 분의 언약 맹세를 지키셔야 했다. 그리하여 쪼개진 고기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레위기 말씀을 아셨다. 예수님은 아담의 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씌워진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기 위해 반드시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예고하신 새 언약은 그리하여 예수님의 언약의 피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의 주제는 한마디로 ‘언약을 깨뜨린 인간과 그 언약을 회복하고 성취하신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언약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이 단지 많은 후손을 약속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언약을 온전히 성취할 단 한 명의 후손에 대한 언약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지만 그 언약이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그 언약의 계보를 믿음으로 이어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는 불임의 여인이었다. 히브리서는 사라의 믿음을 이렇게 말한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기적이었다. 사라가 태가 끊긴 뒤에 아기를 가졌다면 처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기적이었다. 리브가 역시 믿음의 여인이었다.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고 하란을 떠날 때 그의 가족은 그녀를 이렇게 축복해 주었다. 창 24:60,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그런데 이 축복은 시어머니 사라가 받은 축복과 그 내용이 같았다. 창 22:17,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그들의 후손이 원수의 성문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 역시 결혼하고 20년 동안 불임이었다. 결국 이삭의 간구에 하나님이 응답하심으로 리브가는 임신하여 쌍둥이를 낳게 된다. 이 역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그리고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예언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에서 네 명의 여인을 언급한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다. 다말이 유다와 관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계보는 끝났을 것이다. 라합은 여리고의 이방 창기였다.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몬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계보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녀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가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계보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계보는 결코 거룩하고 고상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죄인도, 이방인도 예외 되지 않는 것이다. 마태가 기록한 계보는 그 명단만으로도 이미 복음이며, 혈통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배타성을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유대인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는 것이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언약은 현재진행형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과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주기 위함이다. 바울은 말한다.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의 피를 흘리셨음을 믿고, 그것을 “예”로 받을 때 얼마든지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생명과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통해 언약의 계보는 이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는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의 유업을 이어가는 모든 성도들을 통해 계속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가? 여러분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겠다는 약속의 말씀과 꿈이 있었는가? 혹 그것이 너무도 더디 성취되는 것 같은가? 비록 더딜지라도 상황과 환경 때문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믿음을 일으키기 바란다. 비록 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방향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약속은 엄마 아빠만 받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는 우리 자녀들도 받는 것이다. 요셉은 어렸을 적 꿈 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었다. 아빠, 엄마 따라와 어렵게 언어 적응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현장인지 누가 알겠는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그 약속은 이루어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땅과 수많은 자녀라는 큰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그 큰 약속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의 작은 시작을 통해 결국 후대에 현실화된다. 신앙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손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 우리가 걸어야 할 긴 여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약속하신 방향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완성하시는 날이 올 것이다. 바라기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자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함으로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