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1월 2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6 약속의 자녀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7-8)
큰 아들이 네 살 때인가 사역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쉬고 싶었는데 이 녀석이 축구하러 나가자고 공을 챙기는 것이었다. 아빠 쉬고 나중에 하면 안 될까라고 했는데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늘 축구 하기로 아빠가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이라는 말에 아들 손에 이끌려 축구하러 나갔던 기억이 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원망이 쌓인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은 대부분 이루어졌고, 남아 있는 약속도 이루어져 가고 있다. 그런데 1세기 로마에 살던 이방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끝내고 이제는 교회와 약속을 맺으셨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정말 끝내셨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이 어떤 답을 내 놓았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로마서 1장에서 8장에 걸쳐 바울은 모든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했다. 그런데 이제 바울에게 마음에 걸리는 대상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해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받은 특권들을 생각할 때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바울은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이렇게 소개한다. 롬 9: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유대인들의 특권은 먼저 양자됨이다.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2)고 표현하셨다.그들은 광야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또한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들이 있었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이지 않는 특권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또한 약속들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올 것에 대한 구약의 약속들을 말한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그들과 동족인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이처럼 많은 특권이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은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에 있던 이방 기독교인들 중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죽인 민족이라는 반유대주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들은 끝났고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 끝난 것일까? 바울은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롬 9:6-8,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바울은 이스라엘과 약속의 자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즉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선언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인 자신들이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를 구분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녀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약속의 자녀인 이삭에게 주어졌다. 에서와 야곱이 다 같은 이삭의 자녀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약속의 자녀인 야곱에게 주어졌다.
왜 이삭인가? 왜 야곱인가? 얼마 전 돌아가신 랍비 조나단 삭스를 그 이유를 이렇게 풀어간다. 성경은 이스마엘을 ‘광야에 거주하며 활 쏘는 자’로 소개한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 들사람’으로 소개 된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힘과 기술로 자연을 정복하는 사람들은 영웅에 해당 된다. 그들이 성경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 있었다면 영웅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반면 이삭과 야곱은 그런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묵상을 좋아하던 조용한 사람이었고, 야곱 역시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하기 좋아하는 ‘집돌이’였다. 그들은 한마디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의 영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믿었던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오랜 시간 믿음으로 반응했던 자들이었다. 믿음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했던 일들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약했기에 더 많이 하나님께 엎드리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도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믿음의 용량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지지 않았고 오직 믿음으로 반응한 약속의 자녀들을 통해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게 바울의 답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만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이 답변한다. 롬 9:14-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만을 일방적으로 편애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를 선택하신 것은 그 약속의 자녀만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결국 많은 사람이 복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전하는 긍휼의 도구가 되길 원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온 민족에게 전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결코 그 영광을 독차지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잊었다. 그들은 선택된 자로서 특권만 누리기 원했지,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놓쳤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놓치고 있었던 사실을 이렇게 언급한다. 롬 9:23-24,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기 위해 유대인 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부르시고 이방인도 약속의 자녀를 삼으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이미 예언되어 있는 구약의 말씀임을 증거로 제시한다. 롬 9:25-27,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이방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택하고 사랑했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자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백성을 일으키기 원하셨다. 유대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빠진 것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그들이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빠져 오직 믿음으로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는 선지자의 외침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은 결론을 말한다. 롬 9:30-3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예수라는 돌에 걸려 넘어졌고, 이방인들은 오히려 반석이신 예수를 믿고 의를 얻게 되었다. 과거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특권과 전혀 상관이 없었던 이방인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지금 많은 유대인들이 놓친 특권들이 고스란히 예수를 믿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돌아왔다. 과거 유대인들이 누렸던 양자 됨, 하나님의 영광과 언약들, 율법, 예배와 약속들, 조상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것이 되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약속의 자녀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약속의 자녀는 나의 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약속의 자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그 약속을 따라갈 수 없기에 기도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반드시 도우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강함을 힘입는다. 결국 믿음으로 반응하는 약속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강한 자가 되는 것이다. 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강한 자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강한 자들이 엄두도 낼 수 없는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을 결국에 이루어 내는 것이다. 거기에 약속을 따라가는 자녀들의 특권이 있고, 인내가 있고,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닌다. 그러나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약속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남은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는데 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며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 일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롬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유대 민족이 넘어진 것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행 13:46,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복음의 깃발이 이방 세계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넘어짐으로 이방인인 우리들이 약속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우리 이방인들이 누리는 구원의 풍성함은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게 된다. 우리의 풍성함이 그들을 시기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풍성함 때문에 유대인들이 질투가 나서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구원받고 회복한 충만함은 다시 이방인들에게 더 큰 영적인 풍성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롬 11: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의 넘어짐이 아니라 그들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끝났고 교회인 우리가 약속의 자녀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신념이다. 그들에겐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다. 그들은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롬 11:28-31,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긍휼은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우리에게 이르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넘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긍휼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대가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위해 이제 교회가 약속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을 위해 치러야 할 사명이 있다. 유대인에게서 나온 구원은 유대인들을 약속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다시 이스라엘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9장, 10장,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전체 구원의 그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할과 그들의 회복과 구원을 배제한 복음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씨를 잇기 위해 이삭을 선택하셨고, 야곱을 선택하셨다. 사탄은 이 씨를 없애려고 끊임없이 공격을 했다. 애굽의 바로는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려고 명령했다.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유대인을 진멸하려고 했다. 헤롯은 약속의 씨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은 기적이다. 이 모든 사탄의 방해를 뚫고 유대인 중에 약속의 자녀가 살아남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전한 복음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우리 때문에 넘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자녀로 세워지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바라기는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약속의 자녀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