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포션 7 나의 하나님

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1월 2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7 나의 하나님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51)

하비 콕스(Harvey Cox)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세속화’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세속화는 “인간의 관심이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다. 요즘 ‘팡(FANG) 주식’이란 말이 있는데, 팡은 페이스북(Facebook), 아마존(Amazon), 넷플릭스(Netflix), 구글(Google)의 앞 글자를 합친 단어다. 코로나 이후에 이 팡주식은 더욱 상한가를 달리고 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요즘 사람들의 관심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그것도 온라인 세상으로 옮겨진 것 같다. 모이기를 힘쓰며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야 할 교회는 이처럼 세속화 시대, 비대면 시대라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교회사에 전례가 없었던 커다란 위기 앞에서 교회는 올 한 해를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채워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이 더 많고, 성장보다는 생존이 염려되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통해 다시 감사를 회복하는 은혜가 있길 바란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나다나엘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바돌로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다. 갈릴리 가나 출신인 그는 1세기 당시 갈릴리를 지배했던 시대적 절망감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갈릴리는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었다. 갈릴리는 또한 당시 로마의 통치에 맞서 투쟁했던 열심당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1세기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의 메시아가 출현해서 로마를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이라는 ‘메시야 대망 사상’이 가득했다. 나다나엘도 그가 살던 시대를 곱게 보았을 리 없다. 상황을 보면 감사할 일이 그에게 없었다. 그는 구약 말씀을 묵상하며 어려운 현실을 정리해 줄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때 그의 친구 빌립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1:45,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사람이라면 나다나엘도 오래도록 기다려온 메시아였다. 그런데 반가움보다는 의혹이 앞섰다. ‘나사렛이라고?’ 나다나엘은“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고 빌립에게 되묻는다. 그는 나사렛에서 한 7km 떨어진 가나 출신이었다. 그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구약의 말씀은 알았지만, 나사렛 촌구석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대답한다. “와서 보라.” 그래도 궁금했던지 나다나엘은 친구의 말에 응한다. 그런데 예수님께 가 보기로 한 나다나엘의 결정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만남으로 이어진다. 요 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속으로 놀랬다. 이분은 나를 만난 적이 없는데,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토라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야곱을 언급한 것임을 알 것이다.

간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돌로스(δόλος)’다. ‘미끼’, ‘속임’이란 뜻이다. ‘미끼’는 물고기를 속이는 도구다. 속임수의 대명사였던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20년이 지나 다시 벧엘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그 때의 야곱은 이미 그 안에 간사한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간사했던 야곱이 아니라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하신 것이다.

스바냐서에는 이런 예언이 있다.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여기서남은 자’는 메시아 시대에 남아 있는 자를 말한다. 어쩌면 나다나엘은 이 남은 자가 되기 위해 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며 진실하게 살아왔는지 모른다.예수님의 말씀에는 나다나엘이 바로 선지자 스바냐가 묘사한 것처럼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는 뉘앙스가 있다. 나다나엘은 이 말씀에 놀라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묻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요 1:48)”고 대답하신다.

왜 예수님은 다른 장소도 많았을 텐데 하필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을까? 무화과 나무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몇 군데 말씀을 찾아 보자. 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그 날’은 메시아가 오는 날을 말한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 아래 앉는다’는 것은 메시아 왕국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가랴서 3장 8절에는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싹은 히브리어로 ‘쩨마흐(צמח)’인데, 이는 메시아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용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 쩨마흐를 언급했다.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쩨마흐)를 일으킬 것이라따라서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며 무화과 나무 아래에 앉는 때는 바로 다윗의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때이며, 그것은 곧 메시아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다나엘은 평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언약의 말씀을 묵상하며 간절히 메시아의 시대가 오길 기도해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다나엘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 무너진다. 그리고 고백한다. 1:49,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외친 베드로의 고백과도 같은 놀라운 신앙고백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이제 메시아 왕국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그의 기대가 담겨져 있는 고백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다나엘과 거기 있던 제자들에게 앞으로 너희가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뭘까?

구약에서도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던 장면이 있다.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에서였다. 창 28:12-13,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이것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치다가 꾼 꿈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닥다리는 히브리어로 ‘술람(סלם)’이다. 알다시피 히브리어는 그림언어다. 각 문자가 그림에서 온 것이다. 싸멕(ס)의 히브리 고어의 모양은 받침대, 지지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다리는 그곳에 몸을 지지하여 오르는 것이다. 라메드(ל)는 목자의 지팡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지팡이는 통제하고 다스리는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멤(ם)은 물을 형상화한 것이다. 생명수나 생명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다. 야곱의 꿈에서 천사들은 사다리를 ‘의지하여’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 천사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 받아 지상으로 내려 온다. 그리고 그 사다리 끝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려 온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하셨던 땅과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다시 하신다. 이처럼 사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 야곱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확인해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 야곱의 인생에 이렇게 하늘이 열렸다. ‘이 세상’에서 불안해 하던 야곱에게 ‘저 세상’이 열린 것이다. 야곱은 이제 부모와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전에 하나님을 ‘그’라고 불렀던 야곱은 이제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부른다. 창 28:22, “of all that you give me I will give you a tenth.”

야곱이 꿈에 보았던 사다리는 미래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적 그림이었던 것이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권위를 부여 받아 사람들이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술람, 즉 사다리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이보다 더 큰 일’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가 되신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나다나엘의 인생에도 하늘이 열렸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염려하던 그에게 ‘저 세상’이 열린 것이다. 이 후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 21:1-2,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된다. 이 후 그는 죽기까지 그가 경험한 ‘저 세상’을 간증하는 사도가 된다. 그는 인도와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고 만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산 채로 온 몸의 살가죽이 벗겨지고 그 뒤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순교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 문명의 풍요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번영과 풍요의 한 복판에서 왠지 더 깊은 소외를 느끼고 있다. 인공지능을 개발해서 그 때문에 많은 편리함을 누리지만 이제는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에서 소외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것에 인간 스스로가 예속되는 현상’을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 바하는 ‘소외(疏外)’라고 말했다. 소외만큼 감사를 빼앗는 것은 없다. 사람으로부터 내가 소외될 때, 나의 일로부터 내가 소외될 때, 또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내가 소외될 때, 세상은 풍요로운 것 같고 많은 물질이 있지만 왠지 나는 거기서 소외되어 있는 것 같을 때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린다. 그 소외가 깊어질수록 감사할 수 있는 감각이 마비된다. 감사의 깊이가 떨어진다. 이러한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뭘까? 그것은 만유를 지으시고 만유를 붙들고 계시는 절대자와 연결되는 것이다. 내 인생에 하늘이 열려야 하는 것이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영광을 봐야 하는 것이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는 차이가 있다. 인생의 차이가 있고, 영혼의 차이가 있고, 감사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더이상 상황과 환경이 문제되지 않는다. 사람과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감사로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가?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기술의 힘과 과학의 진보로도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께 이르는데 있어서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 한 지를 보여준다. 반면 벧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인 틈을 이어주는 사다리임을 보여주셨다. 이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곧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매어 사는 우리를 ‘저 세상’에 계신 분과 연결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현실에 매어 내일을 염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셨다. 세속화된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온통 ‘이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묶어두려 한다. 4차산업 혁명을 통해 앞으로 ‘이 세상’에는 더더욱 급격한 세속화가 진행될 것이다. ‘저 세상’에 대한 관심은 더욱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 세상’의 변화와 진보를 따라가느라 더 정신없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이르는 것은 명상이나 도를 닦는 것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사실에 동의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 오신 분이다. 어렵게 찾아야 도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낯설고 두려웠던 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야곱은 평생 도망자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남으로 야곱은 이제 약속을 가진 자로 일어서게 된다. 그는 그 약속과 함께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라 믿음의 순례자로 살게 된다. 그에게 만유의 권위자되시는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새로운 인생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야곱은 하늘로 난 사다리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야곱과 같은 인생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도 찾아 오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 세상’을 바라보며 함께 순례하는 여정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시길 원하신다. 간사함과 속임수가 없어도 살 수 있는 참 이스라엘, 이 땅에 남은 자로 우리의 정체성을 바꿔주시길 원하신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에 하늘문이 열리게 되길 바란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며 그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상실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의 영광 때문에 늘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