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2월 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8 한밤의 기도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4-36)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 앞에 설 때가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마주할 때가 있다.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인생의 중요한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불면의 밤이 찾아온다. 잠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뒤척이거나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한다. 형 에서를 만나야 했던 야곱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성경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해(창 32:7)”했다고 기록한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던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토로한다. 그야말로 잠 못 이루는 밤이다. 한밤의 짙은 어둠처럼 우리 영혼에 깊은 밤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야곱이 브니엘에서 마주했던 밤과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마주했던 밤의 모습을 살펴보며 한밤의 어두움을 통과하는 비결을 발견하고자 한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기도한다. 아침에 하는 기도를 ‘샤하릿(שחרית)’, 점심에 하는 기도를 ‘민하(מנחה)’, 저녁에 하는 기도를 ‘마아리브(מעריב)’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기도의 기원을 그들의 조상들과 연결시켰다. 즉, “아브라함이 그 아침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있던 곳에 이르렀을 때,”(창 19:27) 그 때 그가 드린 기도를 최초의 ‘샤하릿’으로 본다. 그리고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창 24:63)한 것을 최초의 ‘민하’로 본다. 또한 야곱이 벧엘에 이르렀을 때 해가 졌고, 그 밤에 그가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을 최초의 ‘마아리브’라고 본다.
야곱은 확실히 밤기도의 사나이였다. 그는 형 에서를 만나기 전 브니엘에서 숙명의 밤을 맞이 한다. 그 때 야곱은 무척 불안해 했다. 형 에서가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도를 해도 그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형의 분노를 풀기 위해 예물을 먼저 보낼 계획을 세운다. 총 550마리의 가축을 몇 떼로 나누어 보내도록 종들에게 조치한다. 그러나 그래도 불안했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중에 일어나 그는 가족을 먼저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는 홀로 얍복강 이 편에 남았다. 이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신다.
창 32:24-25,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천사가 종목을 잘못 선택했다.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평생을 씨름하며 살아온 야곱이었다. 모태에서부터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났던 야곱이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며 악착같이 실력발휘를 한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친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면 하체에 힘을 쓸 수 없다. 절뚝거리는 인생이 된다. 관절이 어긋나면서 야곱은 무력해진다. 야곱은 급격히 무너져 내린다. “나는 에서입니다”라고 아버지를 속이며, 이 때까지 형 에서의 정체성을 붙들고 살았던 그였다. 그는 이제 자기 힘으로 상황을 돌파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천사에게 매달린다. 창 32:26,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천사는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은 말이 아니다. 네가 어떤 존재로 살아왔느냐는 질문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처럼 형 에서의 발목을 잡았고, 아버지 이삭과 삼촌 라반을 속이며 살아왔다. 이름을 묻는 천사의 질문에 그는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자기가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말한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그 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은 ‘사라(שרה)’의 미래형 ‘이스라(ישר)’와 ‘엘(אל)’이 결합된 말이다. ‘하나님이 우세할 것이다, 권력을 쥘 것이다’라는 뜻이다. 야곱은 이제 더이상 다른 사람의 발뒤꿈치를 움켜잡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 밤 그의 인생의 주도권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권력을 쥐고 있는,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생이 되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내일을 불안해 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편법과 속임을 쓰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대면한 야곱은 아침이 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현실적인 두려움이 더이상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바뀌자 그는 형 에서도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결국 야곱은 형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과의 씨름을 끝냈기에 현실에서 마주하는 싸움은 이미 끝난 싸움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밤의 야곱의 기도는 불안한 내일을 넉넉히 맞이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예수님 역시 겟세마네에서 기도의 씨름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마셔야 할 죽음의 잔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그 잔은 다름 아닌 불의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다. 예수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담담히 예언하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자 그 잔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홀로 나아가 기도하셨다.막 1:36,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유대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도나이’나 ‘하쉠’이라고 부른다. ‘아빠’는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아람어 단어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친근한 단어다. 아들로서 예수님은 아빠 하나님에게 그 진노의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다. 아들의 요청을 마다할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셔야만 했다. 그것은 누군가 반드시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다름 아닌 그의 아들이 마시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이 인류의 죄에 대한 처벌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진노의 잔을 허락하셨을까?
이사야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인류의 죄악을 담당시키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죄를 처벌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죄에 대한 징계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른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 죽음의 잔을 아들이 담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준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할까? 아들은 살이 찢겼지만 아버지는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다. 그래서 사실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이 지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최선이었다. 진노의 잔을 아들에게서 옮기지 않은 것, 그러나 그것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런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최선이었다.
예수님에겐 이 하늘 아버지가 전부였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 삶의 전부가 되는 목적이었다. 예수님 역시 고통스러웠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에게 잠시라도 버림받는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기 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다.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아들이 되셨다. 예수님에겐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다. 더 나아가 하늘 아버지가 가장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 밤,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를 이렇게 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결국 겟세마네는 아버지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나의 원함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뜻만 남는 자리가 되었다. 기도는 그런 것이다. 나의 소원을 조르는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며 내 요청을 조정하는 자리다. 아버지의 뜻을 확인한 예수님은 결국 너무도 무력해보이는 순종을 선택했다. 영광이 아닌 수치과 고난을 선택했다. 인류가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은 죽음의 잔을 받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이 결단과 순종의 기도는 고난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너무도 의연히 그가 감당할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붙든 순간 고난이 주는 고통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밤에 기도에 승리하셨고, 그 승리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로 담대히 나아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승리를 결정짓는 자리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승리는 실제의 싸움 이전에 결정되는 것이다. 실제 벌이게 되는 싸움은 이미 결정난 승리는 확인 하는 싸움일 뿐이다. 야곱이 에서를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브니엘에서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야곱이라는 옛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 역시 영이 육을 지배한 기도였다. ‘나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우세해지는 시간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현실에서 마주쳐야 하는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 되었다. 예수님이 지게 될 십자가는 더이상 그에게 고통이나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문제의 크기를 조각내는 시간이다. 나를 압도하는 상황의 압박을 분해하는 시간이다. 오늘의 고민과 내일의 염려를 분쇄하는 시간이다. 내 육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나의 육을 지배할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내 힘과 내 꾀로 사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될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잠 못 이루는 한밤이 언제 찾아 올지 모른다. 그러나 브니엘의 한밤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변혁의 시간이었다. 겟세마네의 한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순종을 결단하는 구원의 시간이었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통과할 수 없는 인생의 지점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잠 못 드는 밤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초청인 것이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이 인간적인 고민과 순종 사이에서 씨름하셨던 장소이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기도하셨기에 인간적인 고민을 내려 놓고 인류 구원을 향해 일어서실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고통스러운 밤을 맞이할 때 확신없이 일어서지 말라. 확신이 없다면 다시 주저 앉을 수밖에 없다. 기도 한 번 했다고 모든 문제가 원하는대로 다 해결될 거라고도 기대하지 말라. 예수님을 향한 조롱, 제자들의 배신, 십자가로 가는 채찍질은 기도가 끝난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드린 한밤의 기도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다. 이미 십자가를 선택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더이상 고통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라기는 한밤의 어두움이 찾아올 때 기도할 수 있길 바란다. 그 기도의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고 순종의 잔을 선택할 수 있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어두운 밤을 뚫고 변화된 새 아침을 맞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