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2월 1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9 하늘의 시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 1:1-3)
‘런던에서 파리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뭘까?’ 한 신문사가 낸 이 질문에 많은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 중 1등에 뽑힌 대답이 뭘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다. 이것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한다. 질적으로 달리 느껴지는 시간이다. 반면, 시간의 또 다른 개념인 ‘크로노스’는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흘러가는 시간을 말한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객관적인 시간이다. 이 ‘크로노스의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면 그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미가 부여된 시간은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거나 잊을 수 없는 기회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할 일 많은 현대인에게 하루 24시간은 늘 모자란다. 그래서 모두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효율적인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늘 시간에 쫓기고 내 시간을 빼앗는 사람들을 종종 미워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인생에 다시 오지 않는 기회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이 땅의 시간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늘의 시간을 살게 된다. 영원과 이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계보 중에 나오는 유다가 어떻게 하늘의 시간을 살았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하늘의 시간을 사는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마 1:1-3,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듯 야곱의 계보는 장자 르우벤이나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네번째 아들인 유다로 이어진다. 왜 유다일까? 어떻게 유다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하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먼저 유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다.창 38:1-2,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산다. 요셉을 판 사건 이후 인생이 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는 동족도 아닌 가나안 사람의 딸을 데리고 산다. 이름도 없는 그녀를 통해 그는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을 얻게 된다. 이 후 유다는 첫째 아들 엘을 위해 며느리를 맞이한다. 다말이라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엘은 여호와 앞에 악하므로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죽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가 아들도 없이 남편이 죽으면 땅을 상속받지 못하고 제대로 생활할 기반도 잃게 된다. 그래서 죽은 자의 형제가 그 여자와 결혼하여 상속자를 낳아주는 것이 의무였다. 그것이 구약의 고엘 제도였다. 즉 그 여인의 ‘구원자(redeemer)’가 되어주는 제도였다. 그래서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다말을 통해 씨를 이으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형의 아들이 생기면 오난은 장자의 몫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고엘의 의무를 거부한다. 이러한 오난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 그래서 그도 죽게 된다. 자, 두 아들이 죽었다. 유다는 다말에게 친정에 가 있으라고 지시한다. 막내 셀라가 커서 고엘의 의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다는 막내 셀라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도 죽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유다의 아내는 죽고, 그는 홀아비가 되었다. 막내 아들 셀라는 장성했지만 유다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막내 셀라를 다말에게 주겠다는 약속은 물 건너간 것이었다. 다말은 초조했다. 그녀는 자신의 대(代)가 끝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히타이트법에 의하면 과부가 남편의 마지막 형제와 결혼했는데, 그도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다말에게 남은 마지막 고엘은 바로 시아버지 유다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시대의 윤리와는 맞지 않지만, 시아버지 유다의 씨를 받아내는 것이 다말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 다말은 담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변장하여 유다에게 접근한 것이다. 홀아비였던 유다는 그녀를 창녀로 알고 동침할 것을 제안한다. 다말은 협상을 통해 ‘염소새끼를 주겠다’는 유다의 약속을 받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받기까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아 놓는다. 삼개월 후 다말은 임신한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혼자 사는 과부가 임신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간음이었고,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하는게 당시의 법이었다.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지시한다. 창 38: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다말은 지혜로웠다. 시아버지의 죄를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말의 대사는 오직 유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때 유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다. 하나는 다말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다말을 처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행위는 묻히게 되고, 자신은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다. 그런데 유다는 이 두번 째의 선택을 한다.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유대인들은 유다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들은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말한 순간을 유대인 역사의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긴다. 이것은 유다의 인생에 있어서도 카이로스의 순간이 된다. 그 이유는 그의 선택으로 인해 다말이 죽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베레스였다. 베레스가 누구인가? 룻 4:18-22,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베레스는 바로 다윗의 직계 조상이었던 것이다.
랍비들은 ‘그녀가 나보다 옳다’고 말한 유다의 말에서 메시아 사상이 탄생했다고 본다. 죄를 인정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능력이 바로 메시아의 개념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회개하고 변화된 유다를 통해서 다윗 왕이 태어났고, 그의 후손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여겼다. 이처럼 유다는 성경의 여러 인물 중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정통 유대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최초의 ‘바알 테슈바(בעל תשובה)’였다. 바알 테슈바는 ‘회개한 자’라는 뜻이다. 종교적 유대인이 된 사람들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정통 유대인들은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정통 유대인의 삶으로 돌아온다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결국 유다의 회개로 인해 이 땅에 메시아가 오는, 하늘의 시간이 열리는 기회가 된 것이다.
자 그런데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었을까? 미드라쉬에 의하면 그것은 어머니 레아에게서 온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레아는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이었다. 한 많은 여인이었다. 그는 첫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다. 르우벤은 ‘아들을 보라’는 뜻이다. ‘나 아들 낳았어, 이 아들을 좀 보라’는 것이다. 레아는 첫째 아들을 낳고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을 또 낳았다. 그리고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다. 시므온은 ‘들음’이라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라고 고백하며 ‘시므온’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남편 야곱의 마음이 돌아왔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레아는 아들을 또 낳았다. 이번엔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는 ‘연합’이란 뜻이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이런 기대를 안고 지은 이름이다. 한풀이 하듯 내리 세 아들을 낳으며 그녀는 남편의 사랑이 돌아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레아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유다로 짓는다. 유다의 이름은 ‘감사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의 ‘야다(ידה)’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레아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결심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레아의 시선이 바뀐 것이다. 땅만 바라보고 살던 레아가 그 시선을 하늘로 돌린 것이다. 남편을 통해 얻으려 했던 인간적인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께 시선을 둔 시점인 것이다. 레아는 이 고백을 통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결단을 통해 레아에게는 하늘의 시간이 열린 것이다. ‘감사’와 ‘찬양’에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있다. 랍비들은 이처럼 진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었던 레아의 성품이 아들 유다에게도 전해졌다고 본다. 그 성품 때문에 유다는 위기의 순간에도 진실을 인정하고 자신보다 다말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는 하늘의 시간을 여는 기회가 된다. 우리는 절대 감사, 절대 찬양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하늘의 기회를 여는 믿음의 행위다. 나의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나의 자녀도 먹고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자녀도 모든 어려움을 정직하게 극복하며 다른 사람들도 이끌 수 있는 리더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후 유다는 또 한번의 카이로스의 순간을 맞이한다. 총리가 된 요셉 앞에 모든 형제들이 끌려갔을 때였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오게 하기 위해 베냐민을 도둑으로 몰아간다. 그 때 유다가 나서서 말한다. 창 44: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베냐민까지 종으로 팔린다면 아버지 야곱이 겪을 고통을 유다는 걱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기로 자처한다. 그가 자원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다. 후에 유다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는다. 창 49:8, 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말씀대로 훗날 유다 지파는 전체 이스라엘을 이끄는 리더 지파가 된다. 그리고 온 백성이 칭송하며 절하는 다윗 왕이 바로 이 유다 지파에서 나오게 된다. 한편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표현에서 ‘실로’는 ‘메시아’를 의미한다. 이것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누구일까?
유대인 마태는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밝힌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바로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자, 고엘이 되시기 위해서이다.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미가 선지자도 이렇게 예언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여기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어로 ‘모짜오타브 미케뎀 미예메이 올람(מוצאתיו מקדם מימי עולם)’이다. 여기서 ‘케뎀(קדם)’은 ‘창조 이전의 시간’을 말한다. ‘예메이 올람(ימי עולם)’은 ‘영원한 날들, 세상 시작의 날들’이란 뜻이다. 즉, 예수님은 창조 이전의 시간부터 존재했고 영원한 시간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계시던 분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그분을 통해 이 땅에 궁극적으로 하늘의 시간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크로노스라는 땅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주시기 위함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살았다 해도 땅의 시간을 사는,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고백은 “헛되고 헛되다”라는 고백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하늘의 시간을 살아 갈 때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을 순간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혼자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과 함께 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며 숨을 거두실 수 있었다.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 분이 누렸던 카이로스의 시간, 하늘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정리한다. 하늘의 시간은 누구에게 열리는가? 그것은 먼저 회개하는 사람에게 열린다. 자기 잘못을 인정한 유다에게 하늘의 시간이 열렸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왔고, 메시아가 오게 되었다. 하늘의 시간은 또한 감사하는 자, 찬양하는 자에게 열린다. 땅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기로 결단한 레아에게 하늘의 시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아들 유다 역시 하늘이 주시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성품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시간은 희생을 감수하는 자,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열린다. 형제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유다가 결국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리더 지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는 궁극적으로 하늘의 시간이 열리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한 해의 끝이 다가온다. 연말이 되면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의 계획으로 마음이 분주해진다. 크로노스의 시간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바빠지고 여유가 없어질 것이다. 특히 팬데믹으로 시달렸던 2020년을 크로노스적으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깊은 상실감으로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멈춰버린 것만 같았던 올 한 해에도 카이로스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으로 방향 전환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사울에게 쫒겼던 다윗의 시간은 결코 멈춰진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는 영혼으로 빚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다. 그가 인내하며 그 시간을 버티었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권위가 부어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펼쳐질 수 있는 인생으로 빚어졌던 것이다. 우리는 멈춘 듯한 올 한 해의 시간속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이 혼돈의 순간 속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간, 하늘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eternity)’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을 때 우리는 영원한 시간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성탄절이 다가온다. 바라기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삶에 하늘의 시간이 열리고,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영원과 이어지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