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0년 12월 19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0 메시아 예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마시아흐(משיח),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Χρίστος), 한국말로는 그리스도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 있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었다.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했다. 메시아는 후에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메시아에 대한 열망은 역사상 늘 존재해왔다. 현실이 불안하고 어려울수록 메시아적인 인물이 나타나 자신들의 힘든 현실을 구원해 주길 바랬다. 1세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회복해 줄 메시아가 나타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한 열망이 가득할 때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셨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오늘은 예수님이 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도 살펴보고자 한다.
유대교 전통에는 메시아로 불리는 두 명의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예견들이 있었다. 하나는 ‘마시아흐 벤 다비드(משיח בן־דוד)’, 즉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다. 또 하나는 ‘마시아흐 벤 요세프(משיח בן־יוסף)’, 즉 요셉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아다. 이 두 구원자는 유대민족을 포로에서 구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라는 게 유대인들의 기대이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는 정복하는 왕으로, 구원자로 묘사된다. ‘요셉의 자손 메시아’는 겸손하고 고통받는 종으로 묘사된다. 지금 소개하는 구절들이 어떤 메시아를 묘사하는지 맞춰보라.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누구일까? 요셉의 자손 메시아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누구일까? 역시 요셉의 자손 메시아다. 요셉의 자손 메시아는 이스라엘과 열방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묘사된다.
단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누구일까? 다윗의 자손 메시아다. 나라를 회복시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권세 있는 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마시아흐(המשיח)’, 즉 ‘그 메시아’로 여기는 것은 누구일까? ‘요셉의 자손’ 메시아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 메시아’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고통받고 죽임 당하는 연약한 메시아보다는 정복하고 통치하는 강한 메시아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실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 그것은 스가랴서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예언적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했다. 그런데 그들이 외친 구호는 이러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들은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호산나, 우릴 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강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한 기대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후에 베드로의 반응이 이러했다.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강한 메시아이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무리들은 무력하게 끌려 가는 예수를 보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제자들은 힘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뿔뿔히 도망쳤다. 그 때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할 능력이 없는 실패한 메시아였을 뿐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참혹함만 보았지 십자가가 가져올 영광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의 삶을 보면 그가 왜 메시아의 모형이 되는지 알 수 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배신 당한다. 예수님 역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들에게 배신 당하신다. 요셉은 지하 구덩이와 감옥에 갇힌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 처형 전날 대제사장의 집 지하 감옥에 갇히신다. 이번 주 토라포션은 ‘미케츠 슈나타임(מקץ שנתים)’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만 이 년 후에” 라는 뜻이다. ‘만 이 년’은 술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던 시간이었다. 요셉으로선 억울하게 더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낭비되어버린 것 같은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빚으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요셉이 어떻게 애굽제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이다. 또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기 때문이다. 거기서 2 년 더 잊혀진 고통의 시간을 보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혀졌던 요셉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기억된 자가 된다. 그를 잊었던 바로의 술관원장이 요셉의 존재를 2년 만에 기억해 낸 것이다. 그 바람에 요셉은 바로왕 앞에 바로 불려가게 된다. 요셉은 그의 꿈을 해석해주고 애굽의 총리가 된다. 만약 요셉이 2년 전에 풀려났다면 바로와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잊혀졌던 요셉은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에 정확히 기억이 된 것이다.
후에 요셉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짓는다. 창 41:51-52,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므낫세(מנשה)’는 히브리어 ‘나싸(נשה)’에서 온 말이다. ‘잊어버리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는 뜻으로 요셉은 장남의 이름을 지었다.둘째 아들의 이름 ‘에브라임(אפרים)’은 ‘에프랏(אפרת)’에서 온 말이다. ‘열매를 많이 맺다’란 뜻이다. ‘에프라임(אפרים)’은 히브리어 쌍수로 ‘두 배의 결실’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으로 요셉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요셉이 번성한 것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가 고난을 겪었던 땅에서였다. 그가 고난을 겪었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에게 번성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성공에 주목한다. 그의 형통했던 ‘에브라임의 시간’에 주목한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형통은 고난의 시간이었던 ‘므낫세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 ‘므낫세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보내었는가’가 결국 ‘에브라임의 형통’을 결정했던 것이다. 채색옷을 입고 살던 17세 청년 요셉에게 처음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던 시간, 감옥에서 죄수로 살아야 했던 시간은 너무도 가혹했을 것이다. 부당하게, 억울하게 그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라 느껴졌을 것이었다. 노예로, 죄수로 요셉은 충분히 원망으로 보낼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게 된다. 요셉에게 상황과 환경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결같이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이것은 후에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국가의 일을 지혜롭게 감당할 수 있었던 모판이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삶에도 부당하게 주어지는 시간들이 있다. 새로 발령된 임지에서 무시 받으면서 낯설고 부당하게 느껴지는 시기를 지나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시간을 감수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더 큰 목적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주재원으로, 그 가족으로, 유학생으로 이스라엘에서의 시간들은 분명 이전보다 더 낯설고 힘든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어쩌면 므낫세의 시간이며, 연단의 시간이다. 이 기간에 나를 힘들게 했던 환경과 사람들은 사실 나를 에브라임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훈련 교관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그곳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는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과 사람 섬기는 손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그랬을 때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잊고 싶은 고통의 시간’과 ‘형통의 시간’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므낫세의 시간’과 ‘에브라임의 시간’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우리는 그 간격을 인내와 믿음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요셉에게 형통은 고통을 뚫고 찾아온 시간이었다. 후에 그는 기근에서 그의 형제들과 애굽 백성을 살리는 구원자가 된다. 그에게 주어진 고통의 시간을 감당했기에 마침내 영광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요셉은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감당하며 메시아 역할을 한 인물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고통스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난 메시아였다.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예수는 단지 실패한 메시아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위대한 승리와 영광은 그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골 2:13-15,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해진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던 문서가 소멸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세상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무력해진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죄와 불의, 차별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된 것이다. 진정한 승리와 구원이 세상의 권력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여기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들의 메시아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현대 유대교의 기틀을 세운 12세기 유대 철학자 람밤은 메시아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는 유다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다. 그가 유대인들을 토라의 길로 되돌릴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나가 싸울 것이다. 이 일 후에 그는 성전을 짓고, 모든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 올 것이다.” 그런데 람밤이 말하는 메시아는 ‘요셉의 자손 메시아’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 메시아’일 뿐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그들이 기다리는 이상적인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묘사하는 두 메시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분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다. 이천 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요셉의 자손 메시아’로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십자가의 영광과 승리를 증명하는 메시아로 오실 것이다. 모든 악의 세력을 심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여는 메시아로 올 것이다.
올 해 팬데믹 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고요한 성탄절의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 우리가 즐겼던 성탄절의 흥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난 말구유에서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가져다 준 승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스런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일어나야 한다. 세상의 혼돈이 깊어갈수록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시간이 가까와지고 있다. 힘든 상황과 고통스런 ‘므낫세의 시간’을 우리는 견뎌야 한다. 우리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케 하실 ‘에브라임의 시간’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슥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랍비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기 전에 요셉의 자손 메시아가 올 것이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모든 사람을 대속하는 죽임을 당하고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는 길을 예비할 것이다.’ 이것은 랍비들이 이 구절을 보고 해석했던 말씀이다.유대인들이 그들이 찌른 메시아를 알아보고 통곡하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바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예언의 말씀이 임하는 시간이 오길 기도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결국 요셉을 알아보고 통곡했다. 그들이 배신하고 죽음에 넘겼던 요셉이 사실은 그들의 구원자였던 것을 그들은 깨달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경멸했던 예수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마시아흐 벤 요세프’, 요셉의 자손 메시아인 줄 깨닫고, 그들이 통곡하게 되는 날이 오길 기도한다. 그리하여 해마다 성탄절에 예수님을 찬양하며, 다시 오실 ‘마시아흐 벤 다비드’,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함께 기다릴 수 있는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