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2 섭리의 방향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그 한 치 앞을 내다보고 싶은 게 나약한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 연말이나 연초에는 점집을 찾거나 타로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불안한 미래를 내다보며 지금의 나의 삶이 좀더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점집이 있을까?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점집이 없는 이유는 성경이 그것을 강하게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18:10-12,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2021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지난 한 해 팬데믹의 영향으로 ‘희망찬 새해’라기 보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러운 새해’가 아닌가 싶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 새해의 희망을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말씀이다. 딤후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전제는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으로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의식이다. 바울은 그의 삶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순교 당하기 전,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권면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의 삶의 기준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그의 삶의 현재는 ‘하나님 앞’이었다. 그의 삶의 미래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이었다.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세상 한복판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다.바울은 동일한 삶의 기준점이 디모데에게 있기를 바랬다.그래서 그는 4장에서 두가지 권면을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성경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가르치고 권하는 사역에 힘쓰라는 것이다. 왜 힘써 오래참음으로 그 일을 감당하라고 할까? 그것은 이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많은 지식인들이 성경을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욕망을 실현해 줄 사람들을 따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두번째 권면을 한다.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바울은 지금 이 권면을 로마의 감옥에서 하고 있다. 그는 그간 전도자의 일을 하면서 숱한 고난을 받았다. 그런 그가 디모데에게 ‘너도 나처럼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 덕담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한다면 반갑게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선한 싸움을 감당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바울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싸움이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대로 가기 위한 싸움이다. 여러분은 이 싸움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에는 ‘우연’이 없다. 믿음의 사람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는 사람이다. ‘섭리’라는 말은 세상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토저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고의 길을 허락하신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이 믿음을 놓치지 말라. 보이는 삶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라!”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요구되었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임종을 앞두고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야곱의 모습이 나온다.
창 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왜 요셉의 두 아들을 굳이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키려 했을까?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전 세대를 통해 계속 이어져야 함을 알았다. 그리하여 특별히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구별하여 그들을 축복한다. 창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한글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 이 말의 내용은 이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들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이름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들을 향해 ‘하나님이 너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번성케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이 말씀처럼 오늘날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마다 자녀들을 축복한다. 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게 하시길 원한다”라고 축복한다. 아들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같이 되게 하시길 원한다”라고 축복한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닐까? 왜 ‘에브라임과 므낫세’일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그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지냈던 최초의 유대인 형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녀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우애하며 지내는 것을 보는 것은 부모들의 큰 바램 중 하나다. 두번째 이유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이스라엘 땅이 아닌 우상숭배가 가득한 애굽에서 자랐음에도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은 자녀로 잘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녀들은 세대가 지나면서 부모세대의 뜨거웠던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야곱의 손자였음에도 야곱의 다른 아들들처럼 12지파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한 세대를 뛰어넘어 야곱의 세대와 직접 신앙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하나님 신앙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하며 그들의 잠재력 이상으로 지파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오늘날 유대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어떠한 환경과 운명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그들의 잠재력 이상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도록 매주 샤밧에 축복기도를 하는 것이다.
야곱은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뒤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 모은다. 창 49:1-2,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야곱은 1절에서 ‘후일에 당할 일’을 아들들에게 말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2절에서는 ‘후일에 당할 일’이란 표현이 빠져있다. 그 이유를 랍비 라시는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야곱은 후일에 당할 일을 밝히려고 시도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그에게서 물러갔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야곱은 미래를 내다보고 그것을 알리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것이 유대인 영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인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운명을 믿었다. 델포이에서의 신탁은 그들의 운명이 되었다. 그 운명을 피하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 된다. 거기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탄생했다. 그런데 성경에는 비극이란 단어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차이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히스기야 왕을 예로 들 수 있다.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그는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예언의 말을 듣는다. 왕하 20:1,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이 그에게 운명처럼 떨어진 신탁이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꾼다. 15년 더 그의 생명을 연장 받은 것이다.
조나단 삭스는 말한다. “미래가 이미 기록되었다고 믿지 말라.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우리가 도전할 수 없는 예측도 없다. 우리는 실패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지 않다. 또한 우리는 성공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지도 않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 우리의 의지, 우리의 끈기와 살아남기 위한 우리의 결단으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유대인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은 상당히 성경적이다.
지금 세상이 불안하다 보니 각양의 미래예측서들이 나온다. 갑자기 살기 힘들어지니 운명을 알기 위해 운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운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숙명론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인생을 선택하거나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주어진 운명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이다. 점쟁이에 의지해서 그 운명을 바꿔보려고 굿을 하거나 부적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숙명론은 불신앙이다. 지금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미래의 일에 관심을 가지며 운명과 예측에 주목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그 방향이어야 한다. 그분의 손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일들이 틀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섭리일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혹독하게 나의 삶에 임할 때 우리는 낙심하여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을 대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심령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한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성경읽기를 강조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셉이나, 야곱의 삶에 일어났던 혹독한 고난의 시간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고난은 결국에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예비하신 섭리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도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알았기에, 그도 조상들의 믿음을 이어 받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경의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거대한 일부분을 살다 갔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힘들지라도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를 지나고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고 산다면, 변화가 많고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잘 나가는 삶을 사는 게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며 그 방향에 맞게 내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신앙은 운명과 환경을 거슬러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세상의 방식과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어 보이고 고난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단을 기꺼이 받으며 선한 싸움을 감당할 때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되는 것이다. 또한 결국에 의의 면류관을 받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말한다.시 33:11-12,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헛된 일을 꾸며도, 오직 여호와의 계획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주변 세상 문화에 꺾이지 않는 믿음의 세대로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한 싸움을 감당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운명에 맡겨 살지 말아야 한다. 세상 우상 문화에 지배당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하고 그 방향을 알기 위해 말씀을 알고 기도하는 세대로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자녀 세대도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하며 살도록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
해가 지날수록 더 큰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권면을 새해 덕담으로 드린다. ‘고난을 받으십시오.’ ‘전도자의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무를 끝까지 감당하십시오.’ 바라기는 바울의 고백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으로 나의 달려갈 길을 다하는 한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