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월 2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5 거대 이야기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194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지도어 라비(Isidor Isaac Rabi)는 그가 왜 과학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을 했다. “저의 어머니는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저를 과학자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 ‘오늘 무엇을 배웠니?’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이지, 오늘 좋은 질문을 했니?’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좋은 질문을 한 것이 저를 과학자로 만든 것입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출애굽의 역사가 있기 전날 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명령의 핵심은 자녀들이 질문을 하고 부모들이 그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이다.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왜 이 사건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들에게 대대로 전하길 원했을까? 왜 자녀들이 질문을 하고 거기에 답을 주는 방식으로 유월절을 기억하라고 했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 12:24-27,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모세는 유월절이 시작되는 밤 그 해방의 순간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지켜야할 유월절 규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것은 유월절의 의미에 대해 대대로 자녀들에게 이야기하라는 명령이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한 지 3500년이 지난 지금도 해마다 이 모세의 명령을 지킨다. 유월절 출애굽 한 사건을 이야기로 만들어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출애굽 이야기를 ‘하가다(הגדה)’라고 부른다. 이야기를 뜻하는 ‘아가다(אגדה)’에 정관사 ‘하(ה)’가 붙은 것이다. 유대인들의 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거대한 이야기가 바로 출애굽 이야기인 것이다. 해마다 유월절이면 유대인들은 온 세대가 모여 이 하가다를 함께 읽는다. 이 하가다는 네 가지 형태의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질문은 ‘왜 우리는 이 밤에 마짜를 먹습니까?’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질문이다. 왜 누룩이 없는 빵을 먹어야 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히 애굽을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누룩을 넣고 발효될 때 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밤에 마짜를 먹으면서 당시 출애굽이 얼마가 급박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이다. 쓴 나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번째 질문은 ‘쓴 나물을 왜 두 번 적셔서 먹나요?’이다. 유대인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는다. 소금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흘린 눈물을 상징한다. 그들은 또한 ‘하로셋’이라는 소스에 쓴 나물을 찍어먹는다. 하로셋은 사과, 무화과, 포도를 갈아 만든 소스다. 색깔이 갈색인데, 애굽에서 벽돌을 쌓을 때 사용한 모르타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과 하로셋에 찍어 먹으며 이전 세대가 경험했던 고통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네번째 질문은 ‘왜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뒤로 비스듬히 기대어 먹습니까?’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제는 자유로운 백성으로 편안한 자세로 먹어도 될 만큼 여유와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애굽은 3500년 전의 사건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처럼 유월절 세데르를 통해 그것이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랍비 조나단 삭스는 이렇게 말한다. “출애굽 이야기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인한 정체성을 주었습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억압의 시대에는 자유에 대한 희망을 주었고, 포로의 시기에는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유대민족만큼 많이 정복당하고 흩어진 민족이 없다. 그들은 비록 흩어졌지만 다른 문화에 흡수되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당했지만 그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비결이 뭘까? 그것은 그들에게 거대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다음 세대에 끊이지 않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최고 권력자가 자신들을 위해 역사에 개입했다는 기억, 아무리 당대 최고의 제국이라 해도 하늘 권력자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기억, 그것보다 더 영향력 있는 이야기는 유대 민족에게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3500년 동안 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했다. 그들을 괴롭혔던 앗수르, 바벨론, 로마 제국은 사라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들이 자손들에게 전달해온 거대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백성이다’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붙들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의 시간을 인내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세는 출애굽을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이 사건을 대대로 기념하며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이 출애굽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거대한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구원했던 출애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하실 더 큰 구원 이야기의 예표였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 출애굽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자신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사역임을 말씀하셨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마짜’라는 무교병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너희를 위해 찢겨질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은 포도주 잔을 들고, 이것이 ‘너희를 위해 붓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유월절 양 잡는 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다. 세례 요한이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던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뿌린 자에게는 사망의 권세가 넘어간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를 대신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사망의 권세가 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은 더 크고 영원한 실제를 가리키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 누리게 될 온 인류의 자유와 구원을 가리키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출애굽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 그것을 믿는 우리의 구원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그 긴박한 순간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다음 세대에 대대로 전달되기 원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고전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서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속죄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다시 오신다는 것은 장차 모든 악을 정복하고 의로운 통치를 하실 것에 관한 이야기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전달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사실로 믿었다. 그들은 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계시록의 표현대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 모든 핍박과 참소를 이겨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원의 이야기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와 우리 자녀들 역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이야기는 요한 계시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계 14:8, 11-12,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것은 만국을 자신들의 이념과 권력으로 통제하려는 큰 성 바벨론의 세력이 결국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는 이야기다.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는 살아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난 1년간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간을 지내왔다. 그러나 앞으로 더 어려운 시대가 올 수 있다. 교회가 깨어있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악이 비록 성하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진리는 강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신다. 교회인 우리는 앞으로 이 최후 구원과 승리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이 이야기가 불안한 이 시대에 미래에 대한 소망이 되길 바란다. 바라기는 예수님의 최후 승리를 믿으며 그분이 전하기 원하셨던 구원의 이야기를 세상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