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1월 30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6 두려움 저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눅 8:25)
두려움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다. 두려움은 모두가 피하고 싶은 감정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두려움이 일상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과 마주하게 될 때 두려움은 혼돈이 된다. 갈릴리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어진 제자들에게도 광풍이 이는 호수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주님은 혼돈스러워 하는 그들에게 무얼 가르쳐주시고 싶으셨을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눅 8:22-23,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 배를 띄운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에 갑작스런 광풍이 일 때가 있다. 해발 마이너스 200미터 분지인 호수에 차가운 북서풍이 불면 호수 위의 따뜻한 공기와 부딪히면서 갑작스런 풍랑이 일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갈릴리 호수에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배를 예약할 수 없다. 언제 풍랑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호수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그들도 두려움 앞에선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혼돈스러워 하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그 위태한 상황속에서도 잠이 드셨다. 무림 고수의 포스가 느껴진다. 눅 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일어나 제자들을 위태롭게 했던 바람과 물결을 말씀으로 제압하신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묘사한 것처럼 혼돈의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시 89:9,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시 65:6-7,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일상에 불어닥친 광풍을 그치게 하시고, 그들을 흔들리게 했던 파도를 잠재우셨다.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눅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예수님의 질문은 “Where is your faith?”,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다. 제자들은 호수 저편으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광풍으로 인해 놓치고 말았다. 호수 저편은 주님이 가시고자 했던 곳이다. 광풍이라는 현상은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주님의 말씀보다, 죽을 것 같은 그들 안의 두려움에 집중하게 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두려움이라는 현상에 지배되어 두려움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면하신 것은 ‘너희가 두려움 너머에 있는 대상에게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놀란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라고 서로 말한다. 그들 안에 있었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새로운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것은 만유를 절대적으로 다스리시는 한 분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그렇다. 제자들에게 없었던 것은 주님에 대한 절대적 두려움이었다. 그 절대적인 두려움이 없을 때 우리 역시 세상과 환경이 주는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며 위축되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호수 저편으로 가자’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호수 저편은 거라사인의 땅이었다. 거기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 광인을 만나신다. 예수님은 이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풍랑을 뚫고 호수 저편으로 가신 것이다.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힌 한 영혼을 자유케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신 것이다. 광인 한 사람의 영혼이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 작은 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의 인생 전부가 달라지는 소중한 경험이다. 광인은 온전케 된 이후, 성내로 들어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파하게 된다. 그는 이방 세계에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워진 것이다. 광풍으로 혼돈스러웠던 두려움 저편에서 이렇게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서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홍해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에 이르는 광야 길로 인도하셨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출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블레셋 길은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걸어서 4일이면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에는 애굽의 군사 요새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군대를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을 알았다. 그들이 출애굽을 포기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 것을 아셨다. 그래서 홍해를 지나는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신 광야 길은 더 충격적이다. 애굽의 군대가 그 길로 그들을 쫓아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군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들 앞은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그들 뒤에선 애굽의 군대가 병거를 앞세워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길로 인도하셨을까? 왜 그들에게 극한적인 두려움의 상황을 허락하셨을까?
배수진(背水陣)이라는 병법이 있다. 물을 뒤에 두고 싸우는 전술이다. 도망갈 길이 없어 전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이상 물러설 수가 없기에 죽을 각오로 싸우게 된다. 위험이 높고 예외적인 용기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급진적인 전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다. 출 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큰 일 났다. 이런 분위기라면 전멸 당하거나, 아니면 항복하고 다시 애굽으로 끌려가는 상황 밖에 없다. 모세는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에게 말한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시는 전쟁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바다 저편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들자 하나님은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이 물러가게 하셨다. 물은 갈라지고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우에 물이 벽이 된 그곳을 걸어 지나갔다. 애굽의 병거와 마병들도 그들을 쫓아 바다 길 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러나 새벽에 바다의 힘이 회복되어 애굽의 군대는 몰살 당하고 만다. 애굽의 군대는 이렇게 하나님의 작전에 의해 패배 당한 것이다. 출 14:30-31,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홍해 저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자 했던 곳이다. ‘애굽 군대의 추격’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죽을 것 같은 그들 안의 두려움에 집중하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두려움이라는 현상에 지배되어 두려움 저편에 있는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기적을 경험한 뒤에야 그들은 놀란다. ‘그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라고 그들은 서로 말했을 것이다. 그들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들은 새로운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것은 만유를 절대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두려움이 없었기에 그들은 홍해 앞에서 보이는 현상에 지배되어 두려움에 빠졌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를 희생양으로 삼아 두려움으로 인한 분노를 그에게 쏟아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기적을 보았고 현상에 지배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절대적인 두려움과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두려움 이편에서 두려움 저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 이전과 그 이후는 분명 달랐다. 홍해 이전에 그들의 주인은 바로였다. 그러나 홍해 이후에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었다. 바로의 노예였던 삶에서 이제 그들은 하나님 한 분께 순종하는 종의 삶으로 넘어간 것이다. 홍해를 건너 두려움 저편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광야가 펼쳐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곧바로 펼쳐진 것이 아니었다. 광야는 바로나 세상 왕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존의 두려움에 침식당하지 않고, 매일 매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받았다. 쌓아 논 부의 많고 적음으로 비교당하거나, 그것으로 서로 시기하지 않으며 오직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는 신앙 훈련을 받았다. 이처럼 세상 왕의 통치 너머에 계신 하나님 한 분께 주목할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될 때 우리에겐 두려움이란 감정이 찾아온다. 두려움은 지금 내 눈 앞에 보여지는 현상이 진짜라고 말한다. 위험한 현실이 전부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은 두려움 저편에 있는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그 믿음은 광풍이라는 현상 너머에 있는 호수 저편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다. 당신의 자녀를 위해 반드시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이 믿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우리를 위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광야에서도,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움을 다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두려운 곳으로 이끄실 때도 있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은 비록 두려움이 느껴질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두려움 저편으로 나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 두려움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팬데믹의 광풍 속에서 희생양을 찾아 자신들의 두려움에 대한 분노를 쏟아놓고 있다. 백신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백신을 맞으면 두려움이 끝날까? 잠시 진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나에게 불어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 졸이며 산다. 그런 긴장 속에서 나보다 큰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을 보면 더 안전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안전한 삶을 희망하며 더 큰 배에 올라타기를 원한다. 그러나 큰 배를 탔다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없다. 더 크게 흔들릴 뿐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은 두려움의 문제가 바람이나 파도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더 크고 안전한 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이어야 한다. 제자들의 모든 잘못된 기대와 야망, 의심은 광풍에 흔들려야만 했다. 바람과 함께 그들의 생각 속에서 떨어져 나가야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진행하셔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 안에 있는 세상적인 안전에 대한 기준들은 흔들려야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진행될 하나님나라를 위해 더 큰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광풍을 빨리 멈추어 달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광풍과 상관없이 주님만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이 세상에는 더 많은 광풍들이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는 광풍이라는 현상 때문에 두려워하며 위축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 현상 너머에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더 큰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바라기는 주님이 원하시는 두려움 저편으로 담대히 발걸음을 옮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