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2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18 지식의 열쇠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눅 11:52)
설날, 우리 고유의 새해에 우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인사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화 있을진저’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무엇때문에 이렇게 분노하셨을까? 저주와 화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우리 삶에 진정한 복이 임한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보며 진정한 복이 임하는 그릇으로 우리 자신이 준비되는 시간 되길 원한다.
눅 11:37-38,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한다. 이 식사는 단순히 밥 먹는 자리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생각과 그 분이 선포하시는 복음에 대해 더 듣고 싶어 마련된 자리였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삶 속에서 더 철저히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셨고, 식사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식사 전 손을 씻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손을 씻는 것은 오늘날은 위생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식사 전 손을 씻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정결법에 어긋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그 바리새인의 레이더망에 잡혔고, 그는 이 일로 마음이 언짢아졌다. 예수님은 이것을 기회로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해 얘기하신다.
눅 11:39-41,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밥숟갈을 들기도 전에 식사 분위기는 험해졌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직면하기 시작하신다.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어 겉은 깨끗할지 모르나 그들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더럽혀져 있다고 직면하신다. 내면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손 씻는 일에 열을 내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들의 위선에 예수님은 화가 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세 가지 화를 선포하신다.
눅 11:42-44,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기 위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까지 저울에 달아 십의 일조를 드렸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더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 만든 시행세칙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했고, 자신들은 꼬박꼬박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리면서 종교인으로서의 긍지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정작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다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에 만족했지 정작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 즉 이웃에게 공의를 베풀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에 도취되어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 받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예수님은 그들이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은 시체나 무덤에 접촉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그림자가 무덤에 닿아도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해마다 무덤에 회칠을 했다. 그런데 평토장한 무덤은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밟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정결에 힘쓰는 바리새인들이 실상은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율법교사가 끼어든다. 눅 11: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구별하여 지키는 자들이라면, 율법교사는 율법을 연구해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조항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 있다. 장로들의 유전은 모세 오경을 해설하거나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용시켜 만든 구전 율법을 말한다. 이 유전은 포로시대 이후 율법교사들에 의해 정리되고 기록된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 이후 선민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신앙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율법 연구도 활발히 일어나면서 많은 구전 율법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주전 300년부터 주후 800년 사이에 이런 구전 율법들을 모아 문서화 한 것이 바로 탈무드다. 자신들이 정리한 종교적 시행세칙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은 곧 율법교사인 그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항의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에게도 세 가지 화를 선포하신다.
눅 11:46-47, 52,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교사는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추린다.율법교사들은 많은 율법의 시행세칙들을 만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율법의 멍에를 사람들 위에 지웠다. 정작 자신들도 다 지키지 못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자신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선지자들은 그들이 만든 무덤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지식의 열쇠를 천국 문을 여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는데 사용한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의 소제목은 미슈파팀이다. ‘법도’라는 뜻이다. 문서로 기록된 토라에는 지켜야 할 계명이 613개가 있다. ‘하라’는 명령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개다. 한 예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2000 걸음 이상 걸어선 안된다. 불 피우는 것도 금지다. 당연히 요리를 할 수 없다. 자동차도 엔진 열로 굴러가기 때문에 운전도 금지다. 에어컨 리모컨 누르는 것도 일에 해당되어 금지다. 한번은 유대인이 찾아와 에어컨 리모컨을 눌러주러 그 집에 간 적도 있다. 자녀가 아파도 약병을 손으로 여는 것이 금지된 일이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렇게 율법의 멍에를 지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의 짐, 율법의 멍에는 메고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해주길 원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에게 화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일반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는지 알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씻지 않고 식사 자리에 앉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에 병 고친 것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2:11-12,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였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며 거룩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멍에는 다름 아닌 ‘사랑’의 멍에였다. 사랑의 멍에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희생하는 것은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면 살인하거나 간음하거나 도둑질하거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을 빠짐없이 잘 지키는 자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길 원하셨다. 사도 바울도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마 16:18-19,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율법 교사들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지식의 열쇠였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지식의 열쇠로는 천국문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도 못 들어가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던 것이 지식의 열쇠였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열쇠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열쇠라 생각한다. 사랑으로 열면 천국이 열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주 인터넷 문제로 실시간 예배가 제대로 송출되지 않았다. 많이 아쉽고 속상했다. 그런데 더 속상한 일이 있었다. 그 날 따라 아내나 나나 예배를 더 잘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더 많이 기도했고 더 많이 연습했다. 아내는 성도들이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도록 함께 충분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예배하자고 했다. 나는 나름대로 더 집중된 예배를 드리고 싶었기에 평소와 좀 달리 예배를 이끌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가 보여준 예배 동영상을 참고하며 평소와 달리 인사말 없이 바로 찬양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내가 충격을 먹었다. 먼저 충분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길 기대했는데 바로 찬양으로 시작한 것에 놀랐던 것이다. 나는 아내가 화가 나가나 있었다는 사실을 예배 찬양 순서가 다 끝나고 알았다. 예배는 끝났고 아내나 나나 많이 속상했다. 그날 저녁 가족예배 시간에 오늘 본문을 묵상했다. 그날 묵상 나눔시간은 언쟁의 시간이 되었다. 20분 가량 언쟁이 지속됐다. 평소 같으면 묵상 나눔 후 찬양을 반복하며 틈틈히 중보기도를 하는데, 그럴 분위기도 안되었고 유창이도 힘들어하는 것 같아 찬양 한 곡을 마치고 예배를 마치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예배는 원래대로 마치자고 제안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 각자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묵상한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 오히려 천국문을 닫고 있진 않는가? 우리가 서로 옳다고 생각하는 지식 때문에 다투는 모습을 보며 유창이가 믿음에 회의를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이 올라오며 먼저 유창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창이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유창이는 괜찮다고 했다. 아내에게도 제안해준 것을 제대로 접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시 찬양을 하는데 우리는 각자 그 누구보다도 예배를 더 잘 드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배자입니다’란 찬양을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날 저녁 예배는 그렇게 화해와 감사로 끝났다.
1월초부터 7주가 지난 지금까지 대면예배가 아니라 영상을 통해 예배 드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낀다. 그간 몇 주 설교 말씀을 나누면서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는 천국문을 열 수도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 있기도 했다. 내가 세우고 형성해 온 가치관과 규칙들이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정죄하고 힘들게 하는 멍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식의 열쇠가 아니라 사랑의 열쇠로 하늘문을 열어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음력 새해가 시작되었다. 한 해의 축복을 바라기 전에 우리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내가 세운 종교적 관습과 원칙들을 잘 지키고 있지만, 나는 과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놓치고 있진 않은가?’ ‘외모를 가꾸며 남에게 보이는 모습은 신경쓰지만 내 내면의 탐욕과 악독은 비워졌는가?’ ‘겉은 멀쩡하지만 외식으로 가득한 나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하게 만들고 있진 않은가?’ 돌아보는 은혜가 있길 원한다. 세상속에서 교회가 여러가지로 힘든 때를 지나고 있다. 내가 속한 사회와 세상에서 교회인 우리는 다시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게 되길 원한다. 지식의 열쇠로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의 열쇠로 이 세상 구석구석 하늘문을 여는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에 생명과 소망 넘치는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