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2월 27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0 제사장 직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4)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입은 옷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일 수 있다. 옷은 그렇게 우리를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로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의 볼 품 없는 부분을 가려 주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편지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함께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원래 옷을 입지 않았다. 옷을 입지 않았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금지하신 지식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뒤 그들은 눈이 밝아졌고, 자신들이 벗을 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성급히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옷을 해 입는다. 그것이 인류 최초의 옷이었다. 옷은 히브리어로 ‘베게드(בֶּגֶד)’이다. 그런데 동사형 ‘바가드(בָּגַד)’에는 ‘배신하다, 속이다’란 뜻이 있다. 옷은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배신의 표지로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감추기 위해 입기 시작한 것이었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받아낸다. 다말은 매춘부의 옷을 입고 유다를 속인다. 이처럼 옷은 성경에서 배신과 속임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제사장들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온다. 출 28:2-3,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그의 직분을 위한 옷이 따로 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과 다른 제사장들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으라고 명령했을까?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그 옷이 대제사장이라는 그의 직분과 사명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는 이유는 아론이라는 한 개인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의 직분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아론이 입은 옷은 그 자체가 거룩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옷에서 아론이라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특히 대제사장이 차는 가슴 흉패에는 12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한마디로 하면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슴에 품고 책임 진다는 의미다. 그것은 아론이 어떤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출 28:29-30,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아론은 매일 제사를 드리러 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그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해야 했다.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죄가 많다고, 모지르다고 제외시킬 수 없었다. 거역하는 백성들까지도 아론은 그의 가슴에 품어야 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은 항상 그의 가슴에서 빛나는 보석으로 있어야 했다. 아론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끊임없이 중보하고 중재해야 했다. 그가 매일 입는 옷이 그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편지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우리 역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한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하나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전의 죄악과 허물의 수치를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아담이 수치감으로 두려워했을 때 하나님은 동물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만들어 그의 수치를 가려 주셨다. 그 가죽옷은 피를 흘림으로 인간의 수치와 죄를 가려 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가려 주시지 않았다면 아담은 영원히 수치와 죄책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려 주셨기 때문에 그는 용서받은 자로, 수치와 죄가 가려진 자로 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에 용서받은 자로, 수치와 죄를 가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먼저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자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시는 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의의 자녀가 된 바울은 그의 사명을 알았다. 그것은 그가 복음의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아론이 제사장의 거룩한 옷을 입은 것처럼 우리가 복음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을 통해 다른 영혼들이 하나님께 화해하며 하나님 앞에 보석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우리 모두의 사명인 것이다. 우리 역시 아론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하는 복음의 제사장인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혀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사역하도록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의 옷으로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지 않게 하시며 복음의 제사장의 일을 하도록 권위를 부여해 주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행동 양식도 달라진다. 경찰 제복을 입으면 경찰처럼 행동하고, 예비군복을 입으면 예비군처럼 행동한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그의 책에서 성화의 한 방편으로 ‘가장(假裝)합시다’라고 제시한다. 잠시 그 내용을 소개하겠다. 그는 주기도문을 예로 든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존재가 ‘자기 중심적인 두려움과 욕심, 질투, 자만 등 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모아 놓은 꾸러미’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로 가장한다는 것은 대단히 파렴치한 짓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음을 지적한다. C. S. 루이스는 이어서 두 가지 가장이 있음을 설명한다. 나쁜 가장과 좋은 가장이다. 나쁜 가장은 진짜를 밀어내는 가장이지만, 좋은 가장은 진짜로 나아가는 가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밀감이 생기지 않는 사람에게 실제보다 더 친밀한 행동을 가장해서 할 때 이전보다 더 큰 친밀함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우리의 죄된 본성은 사실 긍휼이 없다.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도 없다. 우리의 벌겨 벗겨진 자아는 자신이 손해 볼 것 같으면 언제든지 싸우려고 으르렁대는 맹수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그분의 성품으로 옷 입을 때, 이러한 변장은 진짜로 나아가는 가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옷이라는 히브리 단어에 ‘속이다’는 뜻이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된 본성을 속여서라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부캐’라는 것이 유행이다. ‘부캐’는 본래 캐릭터가 아닌 다른 부 캐릭터로 변장해서 활동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사랑이 식어지고 다른 사람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싶을 때, 우리는 긍휼과 자비의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긍휼과 자비가 나의 ‘부캐’가 되는 것이다. 제 2의 성품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윽박지르고 싶을 때, 우리는 겸손과 온유의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조급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을 때 우리는 오래 참음의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그래야 인내로 연단된 견고한 사람이라는 성품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성품의 옷을 입고 잘 변장하는 것, 그것이 성화의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자녀라는 권위를 부여 받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을 입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고 오늘 본문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으면 세상과 구별이 없어진다. 세상의 가치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본능적인 자아는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는 내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통해 세상의 경계선을 넘어온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로 세상에 보여지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회개하며 우리의 행실을 빨아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옷이 더럽혀지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가 입은 옷을 보고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야 한다. 우리가 입은 그리스도의 옷이 거룩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 아론이 온 백성을 가슴에 품고 성소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내가 가슴에 품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중재하는 중보자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바라기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