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 욥바교회 2021년 3월 13일 설교 이익환 목사
신약포션 22 천국 나그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전 1:1-2)
오늘 본문에 나그네란 단어가 나온다. 나그네는 자기 집을 떠나 낯선 곳에 묵으면서 꽤 먼 길을 가는 사람을 말한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왜 그들을 나그네라고 표현했을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베드로가 편지한 때는 서기 64년 경이었다. 로마 시내에서 대화재가 일어났던 해이다. 당시 로마 시는 1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열 개의 구역이 불타고 온전한 구역은 네 개 뿐이었다고 한다. 흔히 이런 재난이 일어나면 그 비난의 화살은 지도자에게 돌아간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다. 로마 시내에서는 대화재 이후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불이 난 것은 바로 네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새 궁전을 지을 대지를 마련하려고 직접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네로는 이 소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가 희생양으로 삼은 집단은 교회였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에서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도인들은 당시 일반 시민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었다. 네로는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원형 경기장 안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사자의 밥이 되게 했다. 기름이 끓는 가마에 던져 죽이기도 했고, 톱으로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로마 전역으로 퍼졌다. 공포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은 하나 둘씩 신앙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다급히 펜을 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에 흩어져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붙들어 주기 위해 편지 했던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지금의 고난을 인내하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편지에서 ‘나그네’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금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편지를 보낸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는 오늘날로 하면 터키 지역이다. 베드로는 거기에 있는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불렀다. ‘흩어진’은 헬라어로 ‘디아스포라’다.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에 심어지다’는 뜻이다. ‘나그네’는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이스’다. ‘주변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 편지를 받는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주류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반역자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로마사회에서 그들은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며 ‘참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조롱을 당해야 했다.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 때문에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회에서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부당한 고소와 박해를 견뎌야만 했다. 나그네가 느낄 수 있는 서러움이 그들 안에 쌓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그들의 서러움을 달래주고, 흔들리는 그들의 신앙을 다시 세워줘야 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정의한다. 2절에서 베드로는 그들을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세상에서는 나그네처럼 무시 받고 살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목숨 주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들인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영주권 없이 임시로 거주하는 나그네처럼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천국 나그네였던 것이다.
베드로는 천국을 향하는 나그네에게는 산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C.S. 루이스는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상 이 세상을 위해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전환하는 데 토대를 놓은 사도들과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그 예로 들었다. 그들이 이 지구상에 그 모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천국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C.S. 루이스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며 살았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서도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천국을 향하는 나그네에게는 소멸되지 않는 유업이 있다고 말한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천국 나그네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인 것이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변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는 이 세상을 피해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은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나그네의 사명인 것이다. 베드로는 그 사명을 이렇게 말한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임시로 사는 나그네들이지만, 우리는 또한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장이 되기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단지 세상의 주변에 머물며 핍박을 견디는 희생양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가져오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의 왕국을 회복할 때까지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한다.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육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그네에게는 그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그네에게는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의미 없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가야 하는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임을 알게 된다.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을 주목하며 살게 된다. 그 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위해 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그네로 살 때에, 비록 나그네로 설움을 당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나그네라는 정체성이 있었다. 그는 헷족속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사면서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말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나그네라고 표현한다. 히 11: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러나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돌았던 나그네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처를 옮겼던 사람들이었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성막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나온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여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성막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로 구름이 떠오르면 언제든지 이동해야 했다. 그들이 거처를 옮길지라도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으려고 성막을 중심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들이 머물렀던 장막은 어디까지나 임시거주지였다. 그들은 임시거주지를 위해 살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성막의 영광을 따라 움직였다. 출 40:36-38,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여기서 ‘행진하는 길’은 히브리어로 ‘마싸(מסע)’다. ‘장막 말뚝을 잡아 뽑다’라는 뜻의 동사 ‘나싸(נסע)’의 명사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쳤던 곳은 그들이 다시 새로운 여정을 향해 출발하는 출발지가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어 ‘마싸’에는 ‘출발지, 여행’이란 뜻이 있다. 랍비 라시는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존재적 진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To be a Jew is to travel.”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여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처럼 여행을 많이 하는 민족이 없는 것 같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머무는 곳이 일시적인 거처임을 알았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머무는 곳은 어디든지 다음 단계 여정의 출발지가 되는,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새겨졌던 것이다.
이번 주 토라포션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과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두 명령이 왜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주어졌을까? 금송아지 숭배는 한마디로 이 세상의 가치를 반영한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을 상징한다. 금송아지 숭배는 결국 공동체를 망하게 하는 죄악이었다. 반면 샤밧과 성막은 우상숭배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공동체로 사는 삶을 상징한다. 물질을 숭배하는 개인주의를 꺾는 유일한 희망은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이다. 샤밧에 광야 백성들은 함께 떡을 떼고, 함께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함께 나그네된 자로 살았다. 샤밧과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신앙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던 두가지 위대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제국으로 흩어져 주변인으로 살았어도 하나님 중심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지금 한국사회에는 반기독교 정서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조롱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나그네로 살아야하는 설움이 더 커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 사도의 편지는 반기독교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준다. 우리는 먼저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임시거주지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천국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잠시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황금과 자기 욕망을 숭배하며 점점 더 개인주의화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나누라고 택함 받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가 약화되고 있다. 정치적인 입장들이 갈리며 서로가 선택한 입장들을 불편해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권면한다. 벧전 4:7-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지금 우리는 다같이 힘든 때를 통과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친절히 하며, 서로를 더욱 불쌍히 여겨야 한다.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지경을 확장해야 한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지켜냈 듯이,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지켜내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본향에 이르기까지 함께 공동체 된 천국 나그네들이다. 우리는 나그네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루 묵었던 곳은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라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출발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우리는 산 소망과 사랑을 충전해야 한다. 그들이 바로 우리 가족이고, 지금 교회와 직장과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인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천국까지 이어질 하나님 나라 유업을 이어가는 자로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